사대부와 중인 계층에서 애호하던 풍류방(風流房) 음악의 단절을 염려한 뜻있는 인사들이 구가악(舊歌樂)을 전습하고 신악(新樂)을 발전시킬 목적으로 1909년 9월 15일 서울 도동(刀洞)에 설립하였다.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는 전통음악을 중심으로 하되 서양음악도 동시에 교육한 음악단체였다. 최초 발기인은 김경남 · 하순일 · 조남승 · 한석진 · 이병문 · 백용진 · 고우경 · 한규우 · 김현주 · 한용구 등 10인으로, 이들은 풍류방 음악인들과 음악 애호가들이었다. 단체 설립이 구체화됨에 따라 실제 운영을 책임진 임원진을 조직하였는데, 이준용[총재] · 유길준[부총재] · 한석진[부장] · 홍긍섭[총무] · 김경남[교과감독] · 조남승[평의원] · 현동철[간사) · 정한용[회계] 등이 참여하였다.
조양구락부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지원하고자 1911년 2월에 정악유지회(正樂維持會)가 구성되었으며, 발기인으로 이준용 · 박영효 · 윤택영 등 12인이 이름을 올렸다. 같은 해 6월에 이왕직(李王職)으로부터 악도장려금(樂道獎勵金)으로 일시금 2,400원과 매달 200원을 보조 받아 안정적인 재정 상태를 확보하게 되면서 발전적 해체를 하게 되고, 본격적인 음악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위해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로 명칭과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조양구락부는 풍류방 음악을 근본으로 삼아 새로 수용되는 서양악에 적용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그 방안으로 가악과 악기 교육, 서양음악 교육, 그리고 악보 편집 등을 주요 사업으로 설정하였다.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가악으로 남창과 여창 가곡, 가사를 가르치며, 기악으로 거문고 · 가야금 · 양금 · 생황 · 단소 등을 교육하며, 서양악으로 풍금과 사현금(四絃琴)인 바이올린, 서양음악 이론 등을 지도하도록 제시하였다.
이를 위해 교과 감독에 함재운, 가악부 교사장에 하순일, 가악 교사에 신경선, 장덕근, 이영환, 무용 교사에 이병문, 함화진, 음악부 교사장에 김경남, 현금 교사에 이병문, 조이순, 가야금 교사에 김진석, 이병문, 양금 교사에 백용진, 김현주, 주1 교사에 고상익, 풍금 교사에 김인식 등을 교사진으로 구성하였다. 그러나 국권을 잃어가던 당시의 어지러운 정국과 열악한 재정 상태 등으로 인해 본격적인 교육활동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한편, 여성으로 구성된 관기 출신 기생들의 연합체였던 기생조합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조양구락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음악단체로, 후신인 조선정악전습소와 광복 이후 한국정악원(韓國正樂院) 등을 거치면서 풍류방 음악의 보존과 전승에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본격적인 교육활동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조양구락부의 설립 이념과 조직, 사업 등은 조선정악전습소로 그대로 이어져 본격적인 음악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을 가능케 하였다. 또한 풍류방 음악을 주축으로 하되 서양음악을 교육 과목에 편입시킨 점, 관기 출신 기생들의 연합체였던 기생조합의 교육을 담당하여 본격적인 여성 음악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시대적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음악기관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