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국악작품 ()

국악
개념
서양음악의 유입 이후 새롭게 작곡된 국악기 중심의 음악작품. 창작음악작품 · 현대국악작품 · 국악창작품.
이칭
이칭
창작음악작품, 현대국악작품, 국악창작품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창작국악작품은 서양음악의 유입 이후 새롭게 작곡된 국악기 중심의 음악작품이다. 이전 시대의 국악과는 생산 방식 및 결과물에서 차이가 난다. 기존 작품은 작곡가 없이 지역 정서·가치관을 토대로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것이다. 창작국악작품은 작곡가 개인의 독창성이 두드러진다. 최초 창작국악작품은 김기수의 「황화만년지곡」(1939년)이다. 창작국악은 1960년대부터 활성화되고 그 용어는 1970년대에 일반화된다. 주로 국립국악원·국악관현악단 등을 통해 육성·보급되었다. 창작국악은 근대화·자본주의화 되는 과정에서 탄생한 음악적 산물이다.

정의
서양음악의 유입 이후 새롭게 작곡된 국악기 중심의 음악작품. 창작음악작품 · 현대국악작품 · 국악창작품.
개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서양음악이 유입되면서 한국 전통음악계는 새로운 개념의 창작방식을 수용했다. 이는 개인에 의해 의도적으로 계획되어 악보에 기보된 형태의 음악으로, 서양의 근대적 예술관에 의한 작곡행위였다.

새로운 유형의 창작품은 이전 시대의 국악과는 생산방식 및 결과물에서 차이가 났다. 기존의 국악은 대개 뚜렷한 작곡가 없이 지역 공통의 정서와 가치관을 토대로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었지만, 새로 작곡된 음악은 작곡가 개인의 독창성과 의식이 작품 전반에 두드러졌다.

따라서 20세기 이후 새로이 작곡된 국악을 이전 시대 국악과 구별하여 '신국악'이라 칭하였고, 이것이 1970년대부터 국립국악원에 의해 '창작국악'이라는 용어로 일반화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연원 및 변천

최초의 창작국악작품은 국악창작의 개척자로 일컬어지는 김기수의 「황화만년지곡」(1939년)이다. 이 곡은 국립국악원의 전신인 이왕직아악부가 일본 기원 26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계획한 신곡공모에서 당선된 곡으로, 일제의 지배가 영원하기를 기원하는 이능화의 시를 가사로 하고 있다.

김기수는 오선보ㆍ서양화음ㆍ서양음악용어ㆍ서양식 지휘자의 도입을 통해 서양음악의 근대성을 국악의 기반 위에 재현시키고자 했다.

창작국악은 1960년대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조국근대화 과업에 근대화된 국악으로서의 창작국악은 민족중흥이라는 정권의 요구와 효과적으로 부합했다.

이 시기 창작국악은 국립국악원과 서울대학교 국악과에 의해 주도되었다. 1962년 국립국악원은 5ㆍ16 1주년을 기념하는 '신국악작품공모'를 실시하였고, 이때 많은 국악작곡가들이 등단했다. 이는 1968년까지 계속되었다.

1959년에 설립된 서울대학교 국악과는 미국의 음악대학 체제에 따라 설계되어 이전의 구전심수(口傳心授)식 교육은 변화된 체계에 맞게 악보사용에 의존하게 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연주자들의 즉흥능력을 떨어뜨렸다. 따라서 새 음악의 보급은 이전 시대의 공동창작이 아닌, 개인에 의해 작곡된 창작품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창작국악은 국악교육을 대학제도에 수용하며 초래된 필연의 결과였고, 이는 군사정권의 근대화 이데올로기와 맞물리며 성장가도에 들어섰다. 대학에서 국악작곡을 전공한 졸업생들이 배출되며 국악계에도 연주와 작곡이 분리된 서양식 공연예술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국악예술학교의 국악인들도 최초의 국악관현악단인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을 통해 활발한 창작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국립국악원은 1974년부터 창작국악작품들로만 연주되는 '한국음악창작발표회'를 개최하며 창작사업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또한 1977년에 제정된 대한민국작곡상은 작곡가들의 국악창작 의욕을 북돋우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대 창작국악은 민족문화창달을 문화정책의 기조로 삼았던 5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했다. 많은 대학에 국악과가 신설됐고, 지방 국악관현악단들이 대거 창단되었다. 이는 창작국악사에서 관현악 작품의 황금기로 이어졌다. 한편 1980년대 후반 민주화의 열기는 대학에 민중운동으로서의 국악문화를 일으켰고,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함께 국악계도 창작국악의 정체성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부터 창작국악은 실내악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소비지향의 신자유주의 및 세계화 물결과 동반해 국악의 대중화ㆍ생활화ㆍ상품화가 표방되었다. 1996년에는 KBS 대학국악제와 국악작곡축제가 열렸다. 국립국악원의 ‘한국음악창작발표회’는 1997년부터 ‘새가락 삼일야’라는 창작음악 기획연주회로 거듭났다.

2000년대에는 국악방송의 개국으로 창작음악의 육성과 보급이 더욱 활발해졌다. 2004년 창작음악만을 전문으로 연주하는 '국립국악원 창작악단'이 출범하였다. 국악과 타 장르 간의 교섭이 가속화되며 연주자에 의한 개인 및 공동창작의 비중이 커졌고, 작곡가의 출신에 따른 국악작곡과 양악작곡의 분리당위성이 모호해졌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악방송이 추진하는 ‘21세기한국음악프로젝트’, 북촌창우극장과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는 '천차만별콘서트'는 최근 국악창작의 혼종성(Hybridity)을 반영하고 있다.

내용

창작국악작품과 주요 작곡가들을 10년 단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950년대까지 창작국악은 김기수의 독무대였다. 「황화만년지곡」을 필두로, 「세우영」(1941년), 「고향소」(1944년), 「정백혼」(1952년), 「송광복」(1952년), 「개천부」(1952년), 「하원춘」(1953년), 「파붕선」(1954년) 등 민족주의적ㆍ정권친화적 표제의 대편성 관현악곡들이 김기수에 의해 발표되었다.

1960년대에는 서양관현악과 국악기가 만난 최초의 협주곡인 정회갑의 「가야고와 관현악을 위한 주제와 변주곡」(1961년)이 발표되었고, '신국악작품공모'를 통해 이강덕ㆍ이성천ㆍ김용진ㆍ이상규ㆍ이수자ㆍ조재선ㆍ박일훈ㆍ김용만ㆍ이해식ㆍ김달성 등이 등단했다.

1963년 가야금 창작곡의 효시인 황병기의 「숲」이 발표됐고, 그밖에 김기수의 「새나라」(1962년), 이강덕의 「송춘곡」(1965년), 이성천의 「가야금독주곡 놀이터」(1966년), 성금연의 「공후합주곡 신라의 넋」(1966년), 이해식의 「흙담」(1969년) 등이 발표되었다.

1970년대 주요 작품으로는 이강덕의 「가야금협주곡 1번」(1970년), 백병동의 「신별곡」(1972년), 김용진의 「젓대와 농」(1973년), 지영희의 「해금합주곡 삼상곡」(1973년), 강석희의 「예불」(1975년), 황병기의 「미궁」(1975년), 정대석의 「일출」(1977년), 대한민국작곡상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상규의 「대금협주곡 대바람 소리」(1978년), 황의종의 「승무」(1978년), 박일훈의 「아우라지」(1970년대), 이해식의 「해동신곡」(1979년), 김정길의 「추초문」(1979년) 등이 있다.

1980년대 주요 작품으로는 이해식의 「합창과 국악관현악을 위한 두레사리」(1980년), 전인평의 「가야고 독주곡 노피곰」(1980년)ㆍ「거문고 독주곡 정읍후사」(1987년), 이건용의 「태주로부터의 전주곡」(1980년)ㆍ「만수산 드렁칡」(1987년), 김영동의 「매굿」(1981년), 국악관현악의 모델로 자리 잡은 김희조의 「합주곡 1번」(1982년), 정대석의 「거문고 협주곡 수리재」(1984년), 이성천의 「타령 주제에 의한 전주곡」(1985년)ㆍ「21현 가야금을 위한 바다」(1986년), 국악관현악에 타악 열풍을 일으킨 박범훈의 「사물놀이 협주곡 신모듬」(1987년), 김영재의 「해금독주곡 적념」(1989년) 등이 있다.

1990년대 주요 작품으로는 이병욱의 「3대의 가야금을 위한 대화」(1990년), 김영동의 「신수제천」(1990년), 전인평의 「알타이 춤곡」(1991년), 원일의 「신뱃놀이」(1993년), 백대웅의 「남도아리랑」(1994년), 이성천의 「사슴은 노래한다」(1996년), 구본우의 「보카키우사와 멜리스마의 노래」(1998년), 박범훈의 「경기음악을 주제로 한 관현악 신내림」(1999년) 등이 있다.

현재 창작국악작품은 개인의 예술세계에 극도로 집중한 작품에서부터 복합장르의 대중지향적 작품, 전통에 기반을 둔 공동창작에 이르기까지 그 음악적 폭이 더욱 다양화되었다. 2000년대 이후 창작국악 분야에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벌이고 있는 작곡가로는 강상구 · 강준일 · 계성원 · 김남국 · 김대성 · 김미림 · 김성경 · 김승근 · 김정희 · 나효신 · 류형선 · 박경훈 · 백성기 · 변계원 · 신동일 · 안현정 · 유은선 · 윤혜진 · 이경섭 · 이돈응 · 이정면 · 이준호 · 이태원 · 임준희 · 전순희 · 정동희 · 정일련 · 정태봉 · 정동희 · 조원행 · 지원석 · 황호준 등이 있다.

의의와 평가

음악은 그 시대의 사회상과 가치관을 담고 있다. 창작국악은 근대화ㆍ자본주의화 되어가는 한국사회에 국악이 적극적으로 동화되어가는 과정에서 탄생한 음악적 산물이다. 주지하다시피 서양음악에는 창작국악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창작국악은 아시아 전통사회에 서양문화가 유입되며 발생한 근대 국가적 차원의 오리엔탈리즘이 빚어낸 국지적 문화현상이고, 창작국악작품에 대한 평가는 음악 내적인 차원을 넘어 국내외 정치ㆍ경제ㆍ문화적 흐름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과 함께 행해져야 한다.

현재 국악계는 창작국악을 전통국악의 대안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오히려 창작국악의 등장으로 국악의 진정한 전통성은 손상되었다는 평가와 창작국악은 존재론적으로 서구예술음악과 궤를 같이 하는 음악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한 아시아의 창작국악(일본에서는 ‘현대방악(現代邦樂)’, 중국에서는 ‘창작민족음악’이라 지칭)은 전통을 계승한 음악이 아니라, 국민국가의 등장이 초래한 국가적 정체성 형성의 음악이라는 해석도 있다.

문화라는 용어가 근대 유럽의 새로운 자의식과 가치관을 반영한 국민국가 이데올로기의 산물이었던 것처럼, 한국 및 아시아 창작국악의 개념과 정체성에 대한 보다 근본적ㆍ객관적인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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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제자리 찾기와 방황』(전지영, 북코리아, 2008)
『증보 한국음악통사』(송방송, 민속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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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창작의 흐름과 분석』(윤소희, 국악춘추사, 2001)
『우리국악 100년』(한명희ㆍ송혜진ㆍ윤중강, 현암사, 2001)
『한국음악사』(전인평, 현대음악출판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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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국악의 신분 연구2-김기수를 통해 본 국악의 근대화 양상」(윤신향,『음악학』15, 2008)
「창작국악의 존재론에 대한 반성적 논의를 위하여」(이소영, 『생존과 자유』, 민족음악연구회, 2005)
「창작국악의 비평적 담론에 대한 쟁점별 논고」(이소영,『음악학』11, 2004)
「한국음악의 근대화」(이소영, 『나는 다르게 듣는다』, 예솔,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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