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익(李元翼, 1547∼1634)이 자필로 쓴 자손 훈계서는 2건의 서로 다른 고문서로 되어 있다. 한 건은 이원익이 53세에 영의정을 사임하고 판중추(判中樞)에 임명되어 동호초당에 있던 1599년(선조 32)에 아들과 손자, 그리고 후손들에게 써서 남긴 훈계서로 「동호초당에서 아들과 손자 및 후손에게 내린 훈계서」이며, 다른 한 건은 1628년(인조 6) 「연풍현감으로 부임하는 손자 이수약에게 써 준 훈계」이다. 2009년 10월 16일에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고, 충현박물관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이원익의 자필 훈계서 중 한 건은 이원익이 53세인 1599년에 동호초당(東湖草堂)에 한거하면서 아들과 손자 그리고 후손들에게 묘지 조성과 재물에 대해 경계하기 위해 쓴 것이다. 또 한 건은 인조 연간에 손자 이수약(李守約)이 연풍현감(延豊縣監)으로 부임할 때 지방관의 도리와 행정 요령을 가르치기 위해 써 준 것이다.
2건의 훈계서는 모두 각 1장의 낱장 고문서이며, 이원익의 자필 원본이다. 그 중 「동호초당에서 아들과 손자 및 후손에게 내린 훈계서」는 “만력 이십칠년(萬曆二十七年, 1599년(선조 32)”이라는 연기(年紀)가 표기되어 있다. 그의 문집 『오리선생문집(梧里先生文集)』보유편(補遺篇)에 실린 같은 글의 제목은 간단히 「자손들에게 써서 보임(書示子孫)」이라고만 되어 있다. 「연풍현감으로 부임하는 손자 수약에게 써 준 훈계」는 문서의 제목과 연기가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오리선생문집』보유편에 같은 글[서여손수약부연풍현(書與孫守約赴延豐縣)]이 수록되어 있고 '무진(戊辰, 1628년)'이라는 연기가 있다.
「동호초당에서 아들과 손자 및 후손에게 내린 훈계서」내용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풍수설에 미혹되지 말고 선조들이 누대에 걸쳐 묘지를 쓴 금천(衿川) 오리동(梧里洞)에 묘지를 쓰라는 것이며, 둘째는 형제사이에 화목하지 못한 것은 대부분 부잣집이므로 나의 자손들은 의롭지 않은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지 말고 불인(不仁)한 방법으로 축재하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연풍현감으로 부임하는 손자 수약에게 써 준 훈계」는 모두 7조목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은 ① 아비[이의전(李義傳)]의 청백(淸白)을 본받아 집안의 명성을 지킬 것, ②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제일이고, 몸을 수양하는 데는 욕심을 줄이는 것이 제일임, ③ 천하의 실정을 잘 안 뒤에야 천하의 일을 이룰 수 있음, ④ 일에 임하여 성냄을 경계하고 서서히 일의 사정을 파악할 것, ⑤ 한 가지 이익을 일으키는 것은 한 가지 폐단을 제거하는 것만 못하고, 한 가지 일을 만드는 것은 한 가지 일을 줄이는 것만 못함, ⑥ 백성은 어루만져 돌보아야 하고 관속(官屬)을 너무 각박하게 대하지 말 것, ⑦ 모든 일은 그때그때 마음을 다할 것 등으로 이루어졌다.
이 2편의 자손 훈계서는 이원익 자신이 평소에 견지해온 공직자의 윤리와 신념으로서 자손들에게 친필로 적어 준 것이다. 이는 조선 중기 사대부 가문의 가풍(家風)을 보여주는 것이며 조선시대 청백리 정신을 이해하는데 기본 사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