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도현은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익산에서 이리 장날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 · 1운동 당시 이리 남전교회 전도사였다. 4월 4일 이리 장터 독립만세운동을 기독교인들과 사전에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이리 장터에 모인 300여 명의 군중 시위가 격렬해지자 이를 진압하는 일본 경찰과 헌병의 발포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1919년 4월 4일 전라북도 이리에서는 남전교회(南田敎會) 전도사였던 문용기(文鏞璂), 박도현(朴道鉉) 등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박도현은 남전교회 최대진(崔大珍) 목사와 기독교인인 문용기(文鏞祺), 김치옥(金致玉), 박성엽(朴成燁), 장경춘(張京春) 등과 함께 4월 4일 이리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협의하였다. 그리고 전라북도 만세운동의 연락책이었던 김병수(金炳洙)에게 전해 받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수천 장 더 만드는 등 사흘간 밤낮으로 준비하였다.
4월 4일 12시 30분, 이리 장터에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300여 명의 군중들이 모이자 박도현과 문용기 등은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문을 학생과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들은 군중들과 함께 시가를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일본 경찰과 헌병은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였지만, 이들은 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시위 군중들이 1,000여 명으로 늘어나자 일본 경찰은 결국 소방대원과 대교농장(大橋農場) 직원들을 동원하여 시위 군중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고 곤봉과 갈고리로 폭행을 가하였다. 이때 박도현은 현장에서 일본 경찰의 총에 맞아 순국하였다. 박도현와 함께 문용기, 박영문(朴泳文), 장경춘, 서공유(徐公有)[서정만(徐廷萬)], 이충규(李忠圭)가 순국하였고, 10여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39명이 체포되었다.
1994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