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놀 외방전교회 (Maryknoll )

천주교
단체
1911년 6월 29일 미국 가톨릭교회 최초로 창설된 외방전교회.
이칭
이칭
메리놀 외방전교회
내용 요약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1911년 6월 29일 미국 가톨릭교회 최초로 창설된 외방전교회이다. 외방전교회를 조직해 활발한 선교 활동을 벌이는 유럽 교회에 자극을 받아 미국 월시 신부와 프라이스 신부가 미국 최초로 설립하였다. ‘메리놀’이라는 명칭은 마리아께 봉헌한 건물이 소재한 언덕이라는 뜻인 ‘마리아의 언덕’(Mary’s Knoll)에서 유래하였다. 1923년 11월 조선 지부가 공식 출범하였다. 해방 이후 한국 교회가 성장하면서 한국인 사제가 교구를 관할하게 되었다. 2017년 현재 16명의 회원이 본당 사목, 사회복지 활동 등에 종사하고 있다.

키워드
정의
1911년 6월 29일 미국 가톨릭교회 최초로 창설된 외방전교회.
개설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외방전교회를 조직해 활발한 선교 활동을 벌이는 유럽 교회에 자극을 받은 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스톤 교구의 월시(J. A. Walsh) 신부와 노스 캐롤라이나 주 롤리 교구 프라이스(T. F. Price) 신부가 1910년 9월에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개최된 제23차 세계 성체대회에서 우연히 만나 창설을 계획하고, 1911년 전미주교회의(全美主敎會議) 인가를 거쳐 동년 6월 29일 교황 비오 10세에게 인준을 받아 설립한 미국 최초의 외방전교회이다.

메리놀이라는 명칭은 본부 건물 위치에서 비롯되었다. 본회는 창설 1년 만인 1912년 10월 뉴욕 인근 호돈(Hawthorne)에서 현재 오시닝의 작은 언덕 위로 본부 건물을 지어 이전하였다. 이때 건물을 마리아께 봉헌했는데, 이를 기념하고 건물이 소재한 언덕이라는 뜻을 더해 ‘마리아의 언덕’(Mary’s Knoll)이라 부르게 되었다.

설립목적

아시아 지역의 전교(傳敎)를 위해 설립되었으며, 설립정신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 28, 19~20)이다.

연원 및 변천

전교회 창립 후 메리놀 전교회는 교황청 포교성성(布敎聖省)으로부터 첫 선교지로 중국 광동(廣東)교구와 광서(廣西)교구를 위임받았다. 이에 전교회는 1918년부터 4명의 신부를 이 지역에 파견하고, 이로써 아시아 선교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조선 진출은 당시 조선대목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교황청 포교성성에 평안도 지방 전교 문제를 의뢰하면서 당시 조선에 진출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개신교 선교사들과 같은 국적인 메리놀회에 이 지역을 위임해주도록 요청한 일이 계기가 되었다. 마침 메리놀회에서도 총장 월시 신부가 진출을 위해 1916년 직접 조선을 방문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성성의 요청을 즉각 수락하고, 다음 해 5월 번(Byrne) 신부를 평양 지목구 설정 준비 책임자로 파견하였다. 이후 두 명의 신부를 더 파견하여 1923년 11월 24일 조선 지부를 공식 출범시켰다. 1932년에는 만주 무순(撫順), 1935년에는 일본 교토(京都) 지역에도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월시 주교가 총장을 맡은 1936년부터 메리놀회의 성장이 두드러졌는데, 그 한 가지 예로 1941년 동북아시아에 파견한 선교사는 203명이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일제로부터 107명의 선교사들이 적국 출신이라는 이유로 억류당하고,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었을 때는 99명의 선교사들이 박해 끝에 본토에서 철수를 당하는 등 동북아시아 선교가 자주 난관에 부딪혔다.

이처럼 동북아시아 선교가 난관에 부딪히면서, 1942년부터는 애초 대상 지역이 아니었던 중미와 남미로, 1945년 직후부터는 아프리카, 남아시아 지역으로도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현재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세 대륙에서 보건과 사회복지, 지속 가능한 농업과 경제 개발, 인권, 복음화와 종교교육, 사회 홍보, 학교와 직업 교육, 젊은이 양성 활동 등을 하고 있다.

한국 진출

한국에는 진출 다음 해인 1924년 메리놀 수녀회와 함께 의주로 진출하고, 1926년부터는 은산, 마산, 비현, 중화 등에 본당을 신설하였다. 1927년 3월 27일 평양지목구가 설정되면서 번 신부가 초대 지목구장에 취임하는데, 그는 과거 파리외방전교회의 전교 지역이었던 곳들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2대 모리스 지목구장 재임 시절에는 선교사 36명이 파견되어 19개 본당, 134개 공소, 신자 수 17,738명으로 성장했다. 메리놀회는 선교활동과 병행하여 한국교회 자립을 위해 방인 사제와 수녀 양성, 평신도 지도자 양성, 언론·출판 사업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격화되던 1942년 6월 일제에 의해 선교사 전원이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면서 일시적으로 활동이 중지되었다. 당시 평안도 지방에는 51명의 선교사, 21개 본당, 26,424명의 신자가 있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는 미국과 한국 사이의 중재 역할을 담당하였고, 전후에는 전재 복구 및 의료사업 지원에 주력하였다. 1952년에는 충북 지역을 위임받아 청주교구를, 1961년에 인천 지역을 위임받아 인천대목구를 관할했다. 이후 한국교회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관할하던 청주교구와 인천교구를 한국인 사제들에게 넘겨주었다. 이후 메리놀회 선교사들은 점차 현장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본국에 성소가 감소하는 상황까지 겹치면서 한국 지부 선교사들의 나이도 많아졌다. 2017년 현재 16명의 회원이 본당 사목, 사회복지, 원목, 평신도 사도직 지원 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 천주교회 총람 2013-2017년』(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18)
『한국가톨릭대사전』4(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7)
『천주교 평양교구사』(평양교구사편찬위원회, 분도출판사, 1981)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진출과 활동」(김수태, 『부산교회사보』29, 1999)
집필자
박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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