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형식은 4음보격 연속체라는 가사(歌辭)의 일반형식을 취하였고, 4음보 1행을 기준으로 모두 2,366행으로 이루어졌다. 필사 형식은 4음보 1행을 둘로 나누어 나란히 쓰고, 다음 행을 아래 부분에 필사하는 방식으로 상하 2단으로 내려 쓰는 귀글체로 기록하였다. 1음보 내 음량의 부족이나 과다가 빈번하고, 4음보격의 일탈을 보이는 구가 적지 않은 것은 가창이나 음영에 의한 예술성 획득보다는 율독에 의한 정보전달의 용이성(기록성)에 무게 중심을 둔 결과로 조선 후기 가사의 장편화 현상에서 나타나는 보편적 형식 변화이다.
조선의 초대 주미공사(駐美公使)와 대한제국 총리대신을 역임한 죽천(竹泉) 박정양(朴定陽, 1841∼1905)이 31세 때인 1871년(고종 8) 8월 별겸춘추(別兼春秋)로 포쇄관에 임명되어 무주 적상산 사고(史庫)와 봉화 소백산 사고의 포쇄(暴曬) 임무를 마치고 같은 해 10월 돌아와 복명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상세히 기술한 장편 기행가사이다. ‘포쇄’란 사고에 소장된 실록이나 선원록 등의 서적을 정기적으로 점검하여 햇볕이나 바람에 쐬어 습기를 제거하고, 좀이 쏠지 않도록 천궁과 창포 같은 약재를 넣어 충해를 예방하는 일을 말한다. 이 작품은 가사의 일반 구조인 서사-본사-결사의 단락구조에 대비했을 때, ‘서사─본사(1)─본사(2)─결사’라는 4개의 서술단락으로 구분된다. 서사에서는 작가가 포쇄관으로 왕명을 봉행하게 된 사연과 소회를 간략히 기술하였고, 본사(1)에서는 20여명의 일행과 함께 출발, 수원─천안─온양─공주를 경유하여 전주에 도착하여 포쇄에 필요한 장비를 마련하고, 무주 적상산 사고로 가서 포쇄 임무를 수행한 내용을 서술하였다. 본사(2)에서는 다시 남원─보은─속리산─상주─예천─안동을 경유, 제2차 목적지인 봉화 소백산 사고에 도착하여 포쇄 임무를 수행한 내용과, 풍기─단양─충주─장호원─이천─송파─한양에 이르는 귀경 여정을 서술하였고, 결사에서는 왕명을 받들어 두 사고의 포쇄를 수행한 일이 실제로는 삼남지방을 주유한 것이 되었노라고 전체 여정을 술회하면서, “어와 벗님네야 내 구경 어떠한가. 남유가(南遊歌) 지어내어 놀던 일 기록하니, 한가한 때 한바탕 읽어보라”고 하여 독자를 향한 기대치를 드러냈다.
「박학사포쇄일기」는 박정양의 문집 『죽천고』 제1책 권5에 수록되어 있어, 주로 문집을 통한 소통에 한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와 별도로 상·하권 2책 형식에 해당하는 ‘건(乾)·곤(坤)’ 가운데 ‘건’권만 전하는 필사본(임형택 소장본)이 있어, 문집 유통을 넘어선 필사본 유통의 단초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일차적으로 포쇄관 박정양이 적상산 사고와 소백산 사고로 가서 포쇄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는 전 과정을 담은 중요한 공적 기록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일정에 대해 한문으로 쓴 「남유일기(南遊日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국문 가사작품을 남긴 데서 짐작되듯, 이 작품은 왕명을 수행하는 포쇄관의 여정이 주된 서술 라인을 이루지만, 유려하고 활달한 표현으로 작자가 경유한 여러 지방의 명승 경관에 대한 개인적 소회와 감상이 주조(主潮)를 이루면서, 19세기 후반 조선의 지방 견문과 풍속에 대한 정보를 풍부하게 담아낸 환유가사(宦遊歌辭)로서의 문학성을 획득하고 있다. 다만 이 작품이 신미양요가 일어난 직후의 기록물이란 점에서 당대 급변하는 정세를 전연 도외시했다는 점은 재론될 여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