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2년 발해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뒤 『발해국기』를 편찬하였던 장건장의 묘지이다. 장건장의 주요 이력과 발해사로 파견되었던 사실 및 발해의 풍속, 관전(官殿), 관품(官品) 등을 기록한 책을 지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1956년에 베이징(北京) 덕승문(德勝門) 밖에서 출토되었다. 장건장은 바닷길을 이용하여 834년 9월에 발해 상경(上京)에 도착하였고, 이듬해 8월에 유주로 돌아왔다. 이때의 사행 경험과 견문을 통해 『발해기』를 저술하고, 발해의 풍속, 관전(官殿), 관품(官品) 등의 기록을 남겨 당대(當代)에 전하게 된다.
장건장의 주요 이력과 발해사로 파견되었던 사실 및 발해의 풍속, 관전(官殿), 관품(官品) 등을 기록한 책을 지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장건장 묘지는 1956년에 베이징(北京) 덕승문(德勝門) 밖에서 출토되었다.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1970년대에 베이징도서관 소장 탁본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알려지게 되었다. 장건장묘지는 정방형의 개석(蓋石)과 지석(誌石)으로 이뤄져 있고, 개석에는 ‘당 계주자사 겸 어사대부 장부군 묘지명(唐薊州刺史兼御史大夫張府君墓誌銘)’이 새겨져 있다. 지석의 크기는 세로 95cm, 가로 96cm이다. 묘지명의 글씨체는 해서(楷書)이며, 모두 32행, 909자이다. 제작 시기는 함통 8년(867)이며, 내용은 종형인 장규(張珪)가 짓고, 글씨는 동생인 장총장(張總章)이 썼다. 지석에는 원 묘지명 외에 중화(中和) 3년(883) 이장하면서 새긴 묘명(墓銘)이 추가되었다.
묘지에 따르면 장건장은 안차현현위(安次縣縣尉), 영주사마(瀛州司馬), 압해거란양번부사(押奚契丹兩蕃副使), 섭계주자사제군사(攝薊州刺史諸軍事) 등을 역임하였고, 함통(咸通) 7년(866)에 61세로 사망하였다.
묘지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장건장이 발해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발해기(渤海記)』를 저술했다는 부분이다. 묘지에는 태화(太和) 6년(832)에 발해국왕 대이진(大彛震)이 사빈경(司賓卿) 하수겸(賀守謙)을 유주부(幽州府)에 사신으로 보내오자, 이듬해에 장건장이 영주사마의 직위로서 발해를 답방한 내용이 나온다. 장건장은 바닷길을 이용하여 834년 9월에 발해 상경(上京)에 도착하였고, 이듬해 8월에 유주로 돌아왔다. 이때의 사행 경험과 견문을 통해 『발해기』를 저술하고, 발해의 풍속, 관전(官殿), 관품(官品) 등의 기록을 남겨 당대(當代)에 전하게 된다.
장건장의 『발해기』는 문헌기록에는 책명이 『발해국기(渤海國記)』로 나오며, 『신당서(新唐書)』, 『송사(宋史)』, 『옥해(玉海)』, 『남부신서(南部新書)』, 『동도사략(東都事略)』, 『숭문총목(崇文總目)』, 『통지(通志)』, 『국사경적지(國史經籍志)』 등에 언급되어 있다. 이들 기록을 통해 모두 3권으로 이뤄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발해에 관해 현존하는 대표적인 기록인 『구당서(舊唐書)』 발해말갈전(渤海靺鞨傳)과 『신당서』 발해전(渤海傳)은 그 내용 구성이 차이가 있어, 원전 사료로 『발해기』의 이용 여부가 논란이 되었다. 『구당서』에서는 당과의 외교를 중심으로 한 기록이 주를 이룬 반면, 『신당서』에서는 『구당서』에 보이지 않는 발해왕의 시호와 연호, 왕실 칭호, 관제, 행정단위, 지리, 물산, 교통로 등 새로운 정보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구당서』에는 장건장의 『발해기』가 확인되지 않지만, 『신당서』 예문지(藝文志)에는 『발해국기』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어, 『신당서』의 발해전이 장건장의 기록을 토대로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후 장건장의 묘지가 발견되면서 이러한 추정은 통설로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