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창폐지운동은 일제강점기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공창제도 폐지를 위해 전개한 사회운동이다. 일본은 1916년 「대좌부창기취체규칙(貸座敷娼妓取締規則)」을 제정하면서 조선에 공창제를 확립하였다. 1919년 선교사들이 가장 먼저 공창 폐지를 주장하였고, 1920년대 중반부터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조선인에 의한 공창폐지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기독교 여성들이 강연회 개최, 선전 시위, 논설 게재 등 계몽과 선전 활동을 벌이며 공창 폐지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여론을 형성하며 성매매 여성의 구제에 힘썼다. 공창제는 1948년 미군정청에 의해 폐지되었다.
일제강점기 공창 폐지를 가장 먼저 주장한 집단은 선교사들이었다. 1919년 전조선선교사연합대회에서 공창 폐지를 포함한 종교 관련 요구 항목들을 조선총독부에 건의하였고, 1920년 선교사연합회는 공창 폐지 청원서를 총독에게 제출하였다. 또 1924년 공창 폐지 대회를 개최하여 공창제도의 폐해를 지적하는 계몽 활동을 벌이는 한편, 성매매 여성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 중반부터 조선인에 의한 공창 폐지 운동이 본격화된다. 1923년 기독교계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혁청단(革淸團)을 창립하고 계몽 선전 활동 및 직업소개소 설치, 동정금 모집 등을 전개하였다. 이후 공창폐지기성회(公娼廢止期成會)가 설립되어 여러 차례 총독부에 공창 폐지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후로도 공창 폐지 운동을 선도한 집단은 기독교계였다. 강연회 개최, 선전 시위, 신문 · 잡지의 논설 게재 등의 활동이 나타났다. 특히, 기독교 여성들이 앞장섰다.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朝鮮女子基督敎靑年會聯合會),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朝鮮女子基督敎節制會)가 공창 폐지를 주요 사업 목표로 설정하고, 계몽과 선전 활동을 벌이는 한편 성매매 여성의 구제에도 힘을 쏟았다. 1930년대에 들어 공창 폐지론자들은 성매매 여성의 증가 원인이 생계 문제에 있다고 파악하면서 실업 여성의 구제를 강조하였다. 유곽을 직접 찾아 실태를 조사하고 구제시설 설치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기독교계 외 여타 조선인 사회운동에서는 공창제도가 식민 체제의 산물로서 폐지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 속에 활동이 소극적이었다. 1924년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가 ‘공창 여성에 관한 건’을 언급한 이래, 근우회(槿友會)가 1929년 행동 강령으로 ‘인신매매 및 공창 폐지’를 결의하였으나 가시적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한편, 1931년 국제연맹이 각국 부녀 매매에 대한 조사를 시행하자 일본 내에서는 공창 폐지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는데, 조선에서도 이에 대해 관심이 고조되면서 공창 폐지의 여론이 높아졌다.
국제사회의 압박과 조선 내 공창 폐지의 요구에 직면한 일제는 공창제도를 유지한 채 다만 제도를 개선하는 정도에서 마무리하였다. 공창제는 1948년 미군정청이 공창 폐지령을 내리면서 비로소 폐지되었다.
공창 폐지 운동의 궁극적 목적이 제도의 폐지라고 할 때, 결과적으로 폐창을 이끌어내지는 못하였지만, 공창 폐지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여론을 형성하며 성매매 여성의 구제에 힘썼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