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좌한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국내와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일제 밀정.
이칭
이명
박우한(朴佑漢), 박헌(朴憲), 박준식(朴俊植), 유국사(柳菊史), 최강(崔綱)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9년 4월 27일
사망 연도
1986년 4월 15일
출생지
충청북도 옥천
대표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1963)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전좌한은 일제강점기에 국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전개하였고, 국내와 만주에서 독립단체에 가담하여 일제의 통치 시설과 요인 암살 활동을 하였던 독립운동가이며, 동시에 자신이 가담한 모든 거사를 일제 형사에게 밀고한 일제의 밀정으로 알려져 있다.

정의
일제강점기 국내와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일제 밀정.
인적 사항

전좌한(全佐漢)은 1899년 4월 27일 충청북도 옥천군(沃川郡) 옥천읍 죽향리(竹香里)에서 태어났다. 옥천공립보통학교를 나와 서울에서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주요 활동

1920년 12월 종조부 전흥규(全興奎)가 비밀결사 단체 경성상업실업단(京城商業實業團)으로부터 ‘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정서’ 명의의 세금 납부 거부 촉구 문서를 받았다. 이에 고향 후배 임선재(任善哉)와 함께 이 문서를 인쇄하여 배포하고 옥천군청 앞에 게시하였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925년 10월경 옥천군 이남면(伊南面)의 의병 출신인 김응선(金應先)과 독립운동을 함께하기로 하여, 김응선은 폭탄 6개를 제조하여 1개를 실험용으로 사용하고, 나머지 5개를 가지고 동지 4명과 함께 서울로 잠입하였다. 전좌한과 김응선 등은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 단체 창의단(倡義團) 단원인 계의산(桂義山)의 안내로 광화문동의 중국 음식점 광흥원(光興園)에서 폭탄 투척 장소를 분담한 다음, 종로 청진동 진일여관(進一旅館)에 머물며 일제의 통치 시설을 시찰하였다.

김응선 등의 목표는 1926년 1월 31일을 기해서 조선총독부, 서울시청, 조선신궁, 종로경찰서 등에 폭탄을 투척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포고문을 각지에 살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사 하루 전에 발각되어 김응선 등은 숙소에서 헌병대에 체포되고 계의산은 도피하였다. 이때 전좌한은 이들과 행동을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에 체포되지 않고 만주로 도피하였다.

그런데 당시 전좌한은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소속의 가와사키〔河崎〕 경부보(警部補)와 다나베〔田邊〕의 밀정 역할을 하며 김응선 등의 모든 활동상을 가와사키에게 상세히 보고하고 있었다. 심지어 김응선 등이 용산역에 내릴 때 일제 형사대를 인도하여 김응선 등을 지목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1927년 8월 22일 재판정에서 일제 재판관조차 전좌한이 개인적 공로를 세우기 위해 김응선 등을 꾀어 독립운동을 하도록 사주한 후 김응선 등의 모든 활동을 가와사키 경부보에게 밀고한 것이 아니냐는 추궁을 받았다. 이때 전좌한은 거사 직전 자신이 김응선 등을 밀고하였고, 형사대에 김응선의 존재를 지목해 주었으며, 만주로 갔던 것도 가와사키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자백하였다.

거사 후 매제 신화수(申華秀)의 집에서 몇 개월간 숨어 지낸 전좌한은 만주로 건너갔다. 1926년 5월 초순경 중국 지린성〔吉林省〕 중동철도 연변의 이도하자(二道河子)에 있는 유해강(劉海崗)의 집에서 남정(南正) · 이응서(李應瑞) · 김봉준(金鳳俊) 등과 함께 조선혁명군대본영(朝鮮革命軍大本營)이라는 비밀결사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후 40~50명의 단원을 확보하고, 다수의 조선 독립 선전문과 권총 · 탄환, 군자금 수령증 등을 인쇄하여 선발대 김봉준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종로 가회동 뒷산에 근거지를 마련하여 활동에 들어갔다.

전좌한 등은 1926년 10월 1일 경복궁으로 옮겨 지은 조선총독부 신청사의 낙성식을 기하여 주요 기관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9월 22일 매제 신화수와 이일화(李一化) 등과 함께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전좌한은 두 차례에 걸친 일제 주요 시설 폭파 미수 혐의로 1927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1931년 3월 가출옥하였다.

상훈과 추모

정부에서는 전좌한에게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전좌한의 일제 밀정 활동이 밝혀지면서 그의 건국훈장 서훈을 취소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논문

박걸순, 「옥천지역 근대의 기억과 독립운동가」(『중원문화연구』 24,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2016)

신문

『동아일보』(1927. 8. 27.)
『동아일보』(1927. 8. 23.)
『동아일보』(1927. 8. 13.)
『동아일보』(1927. 8. 12.)
『동아일보』(1927. 7. 10.)
『동아일보』(1927. 6. 21.)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