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상(李弼相)은 1887년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에서 태어났다. 직업은 교사였으며, 동우회(同友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동우회는 홍재칠(洪在七)과 다카하시〔高橋久司〕 등이 한 · 일 양국의 국조숭경(國祖崇敬), 양 국민의 정신적 화목과 교육 · 자선 · 식산(殖産) 발달을 목적으로 창립하였으며, 초대 회장은 이윤용(李允用)과 도우즈〔到津公凞〕였으며, 서울 중곡동에 사무소를, 서울 5부(五部)에 지부를 두었다.
1907년 7월 헤이그특사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로 해산당하고 일본의 외무대신 하야시 다다〔林董〕가 고종(高宗)의 퇴위 및 일본 황제에게 사과할 것 등을 거론하며, 국권을 위협하자 동우회 제2대 회장 윤이병(尹履炳), 부회장 김재붕(金在鵬), 이사 이근우(李根雨) · 홍재칠 · 이광수(李光洙) 등과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총리대신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질러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이 일로 주모자 윤이병은 종신 유형(流刑)을 받았으며, 이필상은 종범(從犯)이라 하여 10년 유형을 받고 진도에 유배되었다.
1908년 11월 이필상은 진도에서 탈출하여 해남군으로 들어와 동(同) 우수영(右水營) 부근에서 지역민들에게 항일 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진도읍을 공격하려는 의병진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1909년 1월 4일 진도에 출장 중이던 일제 순사(巡査)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으며, 본서(本署)로 이송 도중 7일 오후 7시경 해남군 개초리(開初里) 인근의 산중에 이르렀을 때 야음을 틈타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감시하던 순사의 총격을 받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200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