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은 1960년 4 · 19 혁명 직후 진보적 청년들이 서울과 부산 등지를 중심으로 조직한 통일 운동 단체이다. 김배영, 김영광, 우홍선 등이 참여하였으며 혁신 정당인 사회당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한미경제협정 반대 운동, 2대 악법 반대 운동, 남북학생회담 지지 운동 등 사회 운동, 통일 운동을 적극 주도하였다. 이듬해 5 · 16 군사정변 세력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고 구성원들이 투옥되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통일 논의와 통일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기 위한 목적에서 진보적 청년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이들은 당시 혁신 정당인 사회당의 외곽 부대로서 활동하였다.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은 1950년대 말부터 청년, 학생층 사이에 존재했던 진보적 이념 서클의 구성원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김배영, 김한덕, 김영옥 등의 성민학회, 김영광, 우홍선 등의 통일청년회 회원들과 양춘우 등 신진회[서울대 문리대 서클] 성원이 합류하여 조직을 구성하였다.
4·19혁명 직후인 1960년 9월경 조직의 모체가 구성되었으며, 초기 대표는 김선적이었으나 곧 물러나고 우홍선이 초대 중앙간사장을 맡으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부산과 서울 지역에서는 김배영, 진병호, 김영옥, 김영광, 이구영, 양춘우, 황금수 등이,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이종문, 배근식, 이재문 등이,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김시현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통민청은 혁신 정당인 사회당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특히 사회당 조직부장 최백근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회당의 외곽 청년 부대라는 인식이 확산돼 있을 정도였다.
기관지로 잡지 『신시대』를 발행하였다. 1961년 2월, 17개 정당 · 사회단체와 함께 '2 · 8한미경제원조협정 반대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어 2월 25일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약칭 민자통) 결성식에 주요 구성 단체로 참여하여 통일 운동에 본격 가세하였다.
1961년 3월 12일, 산하 광주전남연맹 주최로 청중 6천여 명을 상대로 통일 문제 강연회를 여는 등 적극적으로 통일 논의와 통일 운동을 이끌어 나가고자 하였다. 또한 각 대학별 민통련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였으며, 서울, 경상북도, 전라남도 등지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통민청은 여타 혁신 정당, 사회단체들과 함께 ‘2대 악법’ 반대 운동을 이끌었다. 장면 정부가 추진했던 반공특별법, 데모규제법 등을 2대 악법으로 규정하고, 청년 단체들을 규합하여 '2대 악법 반대 전국청년단체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어 3월 20일, 대구역전에서 1만 5000여 명의 시민이 모인 가운데 '2대 악법 반대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1961년 5월 13일, 민자통 주최로 서울운동장에서 1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통일촉진대회'에 참가하였으며, 통민청 대표로 김영광이 지지 연설하였다. 이후 중앙청 앞까지 평화 데모 행진에 동참하였다.
통민청은 비슷한 노선의 진보적 청년 단체였던 민주민족청년동맹(약칭 민민청)과 더불어 청년 세대의 진보 운동을 대변하였다. 두 단체는 5·16군사정변 직전에 적극적인 통합 논의를 시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