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복 ()

의생활
개념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하여 강요된 전시용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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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국민복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하여 강요된 전시용(戰時用) 복식이다. 대개 1930년대 후반에 강요되기 시작했던 남성의 복식을 가리킨다. 국민복은 우리 민족에게는 일제 말기 치욕스러운 기억이었고, 국민복을 입었던 사람은 해방 이후 ‘친일파’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이후 국민복은 근검절약과 생활 개선 등을 논의할 때 등장하는, 검소함을 상징하는 복식이기도 했으나 현재는 착용되지 않고 있다.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하여 강요된 전시용 복식.
내용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국민복(國民服)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1938년이었다. 조선에서 발간된 일본어 신문에는 일본에서 1933년부터 국민복에 대한 논의가 있음을 전하였다. 이것은 전시 체제를 위한 의복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1938년 전시 체제의 국민은 모든 생활 부문에서 절약과 근검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양복의 원료인 양모(羊毛)의 절약을 위하여 총독부에서 총독부 관리의 제복과 청년 단체복, 사회 사업 단체복, 학생복을 개조하여 통일하였다. 그 결과, 국민복 제도는 1938년부터 구체화되어 1938년 5월 관리복을 국방색으로 하고 일본 후생성(厚生省) 제도에 따라 장차 국민복을 제정할 것임을 밝혔다. 1938년 7월 ‘비상시 국민복’을 제정하였고, 내용은 “물자 절약의 견지에서 유행도 전시형으로, 양복의 더블브레스트와, 바지를 접어 넣는 것의 금제, 의복의 규격 통일을 실시” 등이었다. 1938년 8월 조선 총독이 착용한 국민복 형태는 “접어 붙인 목둘레선, 도금한 단추, 허리에 두른 띠 등이 마치 방호복(防護服)과 비슷하다.”라고 하였다. 총독의 제복은 가격이 16원으로 6분의 털에 4분의 「스 · 푸」를 섞은 것으로써 참으로 경제적이고 활동적이며, 비서관 제복은 8원 80전짜리 면직(綿織)으로, 와이셔츠와 넥타이가 없는 것만 하여도 큰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이후 각종 언론에서 국민복을 입어야 함을 주창하였는데 남자의 국민복과 함께 작업복, 부인복, 어린이 복식도 실용적인 양복으로 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1940년 11월에는 신체제(新體制)의 국민복이 법령으로 새로 제정되었다. 1940년 11월 8일의 기사에는 조선의 국민복을 국민복 을호(乙號)로 통용하도록 하였다. 예전에 착용하던 국민복이 있었으므로 기존 조선에서 착용하던 국민복에서 허리띠를 없애고 군복 형식으로 만들게 하였다. 1943년 6월에는 국민복에 각반을 착용하도록 하였으며, 1943년 7월에 「국민복제식(國民服制式)」을 개정하였다. 1944년에는 국민복과 몸뻬를 입어 몸차림에 신경쓰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전시에 남자 양복은 결국 소재 배급이 일원화되었고, 국민복령(國民服令) 실시로 통제되었다. 1940년 남자의 통상복(通常服)은 당국에서 제정한 국민복이었고, 작업복은 양복 작업복을 입도록 하였다. 1940년 말에는 국책에 협력할 것을 내세우며 국민복령을 실시함을 알리고 앞으로 새 옷을 만들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다. 1941년에는 ‘신제정국민복(新制定國民服) 갑호정식(甲號定式), 을호정식(乙號定式)’을 판매하기도 하였고, 백만 부민의 총력 실천을 언급하며 국민복을 장려하는 방법으로 국민복을 공동 구매하여 일반 부민이 다함께 착용하도록 보급시킬 것을 국민총력경성부연맹(國民總力京城府聯盟)에서 결정하였다.

1940년 11월 7일 『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 4139호에 국민복 제도가 고시되었고, 상의(上衣), 중의(中衣), 고(袴), 외투, 모자, 의례장(儀禮章)의 형태가 공식화되었다. 국민복 제도는 갑호, 을호 두 가지가 공표되었고, 갑호 상의에는 허리에 띠 모양으로 두르는 것이 있으나 을호 상의에는 허리에 띠 모양으로 두르는 것이 없었다.

일제강점기 공무원, 교사 등은 이 국민복 착용을 강요받았기 때문에 대부분 착용해야만 하였다.

의의 및 평가

국민복은 1938년부터 그 착용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어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하여 강요된 전시용 복식이었다. 대개 국민복은 1930년대 후반에 강요되기 시작하였던 남성의 복식을 가리키는데, 우리 민족에게는 국민복을 입는다는 것이 일제강점기 말기의 치욕스러운 기억이었기 때문에 국민복을 입었던 사람은 해방 이후 ‘친일파’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국민복은 근검절약과 생활 개선 등을 논의할 때 등장하는, 검소함을 상징하는 복식이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국민복이 착용되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의식주생활사전 의생활』(2017)

논문

남경미, 『한국 남자 일반 복식에 관한 연구: 개항 이후 광복까지』(서울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이민정, 『복식과 이데올로기: 일제강점기와 박정희 정권기를 중심으로』(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인터넷 자료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관보(https://www.nl.go.kr/)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https://www.nl.go.kr/newspaper/)
패션과 번안 번안물로 본 사회와 문화(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80448&cid=59546&categoryId=59546)

기타 자료

「관리복을 국방색으로 장차론 국민복제정」(『매일신보』 1938.05.10.)
「전시 조선인 의복 문제, 의복제의 혁신 제의」(『삼천리』 12-3, 1940.03.01.)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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