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고모자(麥藁帽子)는 좁은 의미로는 개항(開港) 이후 남자들이 주로 썼던 맥고(麥藁)로 만든 모자이고, 넓은 의미로는 밀짚이나 보릿짚으로 만든 모자 일반이다. 맥고는 밀짚이나 보릿짚을 뜻하고, 맥고모자는 그 줄기로 제작하였다.
좁은 의미의 맥고모자 형태는 모자 위 정수리를 덮는 부분이 평평하고 납작하며, 모자의 관 부분과 챙이 만나는 바로 위에 리본이 둘려져 있다. 원래 단색이나 줄무늬가 있는 그로스그레인(grosgrain)으로 된 리본이 달려 있었으나 후에 다양한 소재의 리본이 부착되었다. 모정(帽頂)이 평평하여 ‘일자모(一字帽)’라고도 하였다. 파나마모자에 비하여 챙이 좁고 모자의 윗부분이 낮다. 맥고모자의 챙은 대개 일자형으로 알려져 있으나 챙의 형태가 다른 것도 있다. 따라서 넓은 의미의 맥고모자는 형태가 다양하다.
초기에는 짚을 표백하고 그 후에 짚을 뻣뻣하고 납작하게 만들어서 손으로 엮어 짰고, 짚을 표백한 후에 염색을 하기도 하였다. 1908년(융희 2) 신문 기사에 내부대신(內部大臣) 송병준(宋秉畯)이 인민을 일제히 단발케 하기 위하여 맥고자 몇 만 개를 일본에 주문하였다는 말이 있다더라는 기사 내용으로 20세기 초기에는 맥고모자를 일본에서 수입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1908년 모자 제조 농공연구회(農工硏究會)를 설립하고 우선 맥고자를 다수 제조한다는 기사가 있으나 자세하게 알 수는 없다. 맥고모의 수요가 많아진 후에 국내에서 생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1924년에는 체송인(遞送人), 집배인(集配人)에게 맥고모를 씌우기 위해 맥고모자를 제조하는 중이라는 기사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맥고모자는 19세기 말에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1939년 기사에 맥고모자는 본정통(本町通)에 살던 일본인이 많이 쓰던 것이었고 조선 사람은 쓰지 않았던 것인데, 1909년(융희 3)경 임병삼(林炳三)이라는 조선인이 처음 썼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1900년대 초에는 조선 사람들은 맥고모자를 즐겨 쓰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맥고모(麥藁帽)는 단발령(斷髮令) 추진과 일진회(一進會)를 떠올리게도 한다. 1904년(광무 8) 일진회 회원이 머리를 자르고 맥고모자와 모시로 된 두루마기를 입었고, 1907년(융희 1)에는 농부의제실시(農部衣制實施)에 관하여 양복을 아직 구하지 못한 관원은 머리를 자르고 맥고모자만 착용하도록 하였다. 이후 의관(衣冠) 개량에 대한 의견에서 입자(笠子)는 일본맥고자(日本麥藁子)와 비슷하게 제조하자는 내용이 등장하며, 두루마기에 맥고자를 착용하고 길에서 양양하게 다니는 이들은 일진회원이라는 기사와 더불어 일진회원들이 단발령을 따르고 두루마기에 중절모(中折帽), 중산모(中山帽), 맥고모를 착용할 경우 일반인이 일진회라고 지적하고 미움을 받더라도 계속할 것을 지시하는 내용 등이 있다.
1915년 기차역에 두루마기를 입고, 맥고모자를 쓴 청년들이 여럿 등장한 신문 기사가 있다. 맥고모자가 당시에 널리 유행하지는 않았더라도 1900년대에 비하여 착용 범위가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그후 맥고모는 파나마모자와 더불어 1919년 고종 승하 후 국상(國喪) 기간 동안 백립(白笠) 대신 착용되었고 이후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여름에는 맥고모자와 파나마모자가 많이 착용되었다. 맥고모가 널리 착용된 이후에는 맥고모자의 가격, 유행, 세척 및 관리에 대한 내용이 일반인에게 소개되었다.
맥고모는 단발령 이후 머리가 짧아지면서 모자를 착용해야만 하였던 상황에서 강요되기도 하였고, 단발령을 강요할 때 일진회원들이 먼저 썼던 것으로 일진회원들과 관련된 나쁜 인상도 지울 수 없으나 고종 국상 이후 여름에 널리 착용되었던 모자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