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식례(구일식의)는 일식이나 월식이 있을 때, 잠식된 해와 달을 구하기 위해 대궐과 중앙 및 지방 관청에서 실행한 재난 의례이다. 근대 이전에 천문학적 변고인 일식과 월식은 하늘이 왕에게 내리는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경고로 여겨졌다. 따라서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에는 일식과 월식을 해소하기 위해 왕이 직접 주술적인 구식례를 거행하였다. 그러나 천문학의 발달로 정확한 예측이 가능해지면서 일월식은 천변재이에서 자연적인 사건으로 변모하기 시작하였고, 구식례도 왕이 더 이상 직접 거행하지 않는, 형식적인 의례로 전락하였다.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에 따르면 일식(日蝕)과 월식(月蝕)은 하늘이 왕에게 내리는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강력한 경고였다. 일월식은 해와 달의 영원한 질서도 순식간에 빛을 잃고 사라질 수 있는 것처럼 왕의 절대적인 힘도 주1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하였다. 또한 해와 달의 일시적인 소멸은 세계의 끝을 주2 강력한 상징성을 띠고 있었다.
천도(天道)의 붕괴는 주3의 타락 때문이므로 고려와 조선의 왕들은 일월식의 재앙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식례(救食禮)라는 주술적(呪術的)인 의례를 수행하였다. 밤에 달이 사라질 뿐인 월식보다는 낮이 갑자기 밤으로 변하는 일식이 훨씬 더 위험한 재앙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구식례는 주로 일식을 대상으로 하는 때가 많았다.
고려시대의 구식례 절차는 『고려사(高麗史)』 「예지(禮志)」 군례(君禮)의 ‘구일월식의(救日月食儀)’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일식이나 월식 때 왕은 정전(殿庭) 밖으로 나와 주4을 입고 향(香)을 태우고 주6 구식례를 행하였다.
조선시대의 구식례 절차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군례의 ‘구일식의(救日食儀)’에 자세히 나와 있다. 주7 월대(月臺) 북측에 왕이 앉을 욕위(縟位)를 남쪽을 향하도록 깔았고, 그 앞에 향을 사르는 상을 두었다. 월대 남쪽으로는 청색 북은 동쪽, 적색 북은 남쪽, 백색 북은 서쪽에 설치하였다. 북이 놓인 곳 안쪽에는 북의 색과 같은 색의 깃발 3개를 배치하였다. 또한 북이 놓인 곳 바깥쪽에는 양날 검이 끝에 달린 창인 모(矛)는 동쪽, 창 옆에 칼이 달린 창인 극(戟)은 남쪽, 도끼인 월(鉞)은 서쪽에 두었다.
일식 직전에 소복을 입은 왕이 해를 향해 욕위에 앉으면, 소복을 입은 신하들도 정전의 뜰에서 동쪽과 서쪽에 줄지어 섰다. 일식이 시작되면 향을 피우고 3개의 북을 쳤다. 중앙 관청이나 지방 관청에서도 관원들은 소복을 입은 채 해를 향해 향을 피우고 북을 치면서 구식례를 실행하였다.
음(陰)이 양(陽)을 침범한 일식에서는 양기(陽氣)를 배양하기 위해 북을 쳤지만, 양이 음을 침범한 월식에서는 음기를 배양하기 위해 징을 쳤다. 일식과 달리 월식에서는 동서남북과 중앙에 5개의 깃발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구식례에서 보이는 3이나 5라는 숫자는 주8는 구일식의에서 5개의 깃발, 북, 병기를 사용하고, 주9는 3개의 깃발, 북, 병기를 사용한다는 주10의 내용에서 유래한 것으로
두우(杜佑)주11가 편찬한 주12의 ‘천자합삭벌고(天子合朔伐鼓)’에 의하면, 중국 주(周)나라에서 천자는 일식이 있을 때 음악을 폐하고 소복을 입은 채 5개의 깃발과 북과 병기, 그리고 해를 구하기 위한 활과 화살을 사용하여 구식례를 실행하였다. 해를 향해 활을 쏘며 구식례를 행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구식례는 중국 문헌에 근거하여 구성된 것이다.
15세기 말에 편찬된 『국조오례의』와 달리 19세기 초에 편찬된 『서운관지(書雲觀志)』에서는 모, 극, 월이 아니라 모, 검(劍), 극의 병기를 사용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조선 초기에는 소복을 입었지만, 18세기 말에 편찬된 『대전통편(大典通編)』에 따르면 구식할 때 신하들은 소복이 아니라 옅은 옥색 상복인 천담복(淺淡服)을 입었다. 1742년(영조 18) 5월 초하루의 일식 때 영조(英祖)도 상복의 일종인 옅은 청색의 주13를 입고 직접 구식례를 거행하였다. 따라서 시간이 흐르면서 구식례의 내용이 조금씩 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원칙적으로 밤에 일어나는 일식이나 낮에 일어나는 월식에 대해서는 구식례를 하지 않았다. 지하에서 일어나는 일식이나 빛이 사라졌는지조차 알 수 없는 낮의 월식은 재난이 아니었다.
조선 초기에는 왕이 직접 구식례를 거행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임금이 직접 구식례를 행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또한 임금이 참여하지 않을 때는 중앙 관청에서도 별도로 구식례를 거행하지 않았다. 『서운관지』를 보면 임금을 대신하여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이 주14와 구식관(救食官) 등과 함께 구식례를 집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구식례는 거의 형식적인 의례로 전락하고 말았다.
1734년(영조 10) 8월 22일에 영조는 앞으로는 임금이 직접 구식례를 행할 것이라고 말하였지만, 이것도 오래가지는 못한 듯하다. 정조(正祖) 때는 임금이 모든 관원에게 구식례에 참여하라고 명하였지만, 사헌부(司憲府)의 관원들은 대부분 참여하지 않았다. 1869년(고종 6) 6월에 고종(高宗)은 신하들의 반대로 월식을 위한 구식례를 하지 못하였다. 이때 고종은 태만을 경계하면서 ‘마음의 구식례’를 행하라고 명하였다.
월식보다는 일식의 정확한 예측이 훨씬 어렵지만, 조선시대에는 일식조차도 꽤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 만큼 천문학(天文學)이 발달하였다. 따라서 일월식은 더 이상 재난이 아니라 일정한 법칙에 따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자연적이고 과학적인 사건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가 되면 일월식은 더 이상 임금이 자신을 성찰하면서 주술적으로 해결해야 할 재난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