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양론은 음과 양의 관계로 우주나 인간 사회의 모든 현상과 생성 소멸을 소장, 변전으로 설명하려는 역이론(易理論)이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음양이 하나의 기(氣)가 된다는 관념이 형성되었다.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 도는 어디나 존재하고 만물의 근원이 되는데, 그 도의 변화는 음양으로 설명된다. 음과 양은 서로 의존 관계에 있어 홀로 독립되어 있을 수 없다. 음과 양은 성격에 따라 여러 가지 상호 관계를 맺으면서 자연의 변화를 가져 온다. 그 변화의 여러 양상을 다섯 가지 유형으로 표현한 것이 오행이다.
음양이 만물을 이루는 본체가 된다는 관념은 중국에서도 전국시대에 이루어졌다. 즉, 전국시대에 이르러 음양이 하나의 기(氣)가 된다는 관념이 형성되었다. 『설문(說文)』 통훈(通訓)에 보면, 전국시대 이전에 음(陰)에 해당하는 ‘會’는 구름에 가려 해[日]를 볼 수 없는 것, 양(陽)에 해당하는 ‘易’은 구름이 걷혀 해를 볼 수 있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더 나아가 음양이 만물의 근본이 될 뿐만 아니라 우주론적 방면으로 발전해 천도(天道)와 하나가 되고 도덕적인 의미까지 획득하게 된 것은 송대의 유학 발전과 관련된다.
음양 사상은 중국과의 교섭 초기부터 이미 우리 나라에 들어왔다고 보이지만 구체적인 문헌에 보이는 것은 고구려 유리왕 29년이다. “모천(矛川)이라는 내 위에서 흑와(黑蛙)와 적와(赤蛙)가 떼를 지어 싸우다가 흑와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해석자가 말하되 흑은 북방의 색이니 북 부여의 파멸할 징조다(三國史記).”라는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때는 이미 음양오행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유리왕 29년은 한나라의 평제(平帝) 이후 왕망(王莽)이 정권을 잡은 지 2년째 되는 해로 음양오행 사상이 중국에서 왕성하게 풍미할 때이다. 이 무렵은 오행가를 포함한 일관(日官)들이 시간의 길흉과 함께 방위에 관해 점치던 풍습이 100년 이상 지배했던 때였으므로 우리 나라는 유리왕 훨씬 이전부터 음양 사상을 알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밖에도 쌍영총에 있는 사신벽화(四神壁畫)나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음양 사상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백제도 충청남도 부여군 능산리에 있는 옛 무덤에 사신벽화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백제는 오경박사와 아울러 역학사(易學士), 역박사(曆博士) 등이 있었는데, 이는 음양 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음양오행 사상을 가장 뒤늦게 받아들인 신라에서도 이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태종무열왕 비에 나타나는 귀부(龜趺)에 비신(碑身)을 세운 모습이라든지 신문왕 2년(682)에 세운 감은사(感恩寺) 지석(址石)의 태극 도형, 『삼국유사』에 표현되어 있는 많은 설화 가운데서 음양 사상을 볼 수 있다.
특히, 통일신라 이후에는 성당(盛唐)문화(文化)와의 직접적인 교류가 더욱 활발해짐에 따라 음양오행설의 이해도 더욱 깊어져서 전문 지식인들에 의한 외교 문서의 제작, 시간 관측과 역서(曆書) 제작, 의학 · 법률 등 광범위한 영역에 미쳤다. 시간 관측과 역서 제작 등을 담당하는 누각박사(漏刻博士), 천문박사 등이 있었는데 음양 사상이 토대가 된 것이다.
음양 사상은 어느 한 측면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으므로 음양과 자연 현상, 음양과 도(道), 음양과 만물의 근본, 음양과 오행 등 여러 각도에서 살펴야 한다.
⑴ 음양과 자연 현상
자연 현상 가운데는 사계절이 순환하고 비가 내리고 천둥이 치며, 곡식과 열매가 맺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현상을 포함하고 있다. 음양설에 의하면 이러한 자연 현상들은 모두 음양의 변화에 의해 이루어진다.
『순자(荀子)』 천론편(天論篇)에 “별들이 따라 돌고 일월이 번갈아 비추며 네 계절이 교체하는 등 모든 것이 음양의 변화”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잘 말해 주고 있다. 『관자(管子)』 사시편(四時篇)에는 “음양은 천지의 대리(大理)요 사시(四時)는 음양의 대경(大經)이다.”라는 말도 있다.
더 나아가서 음양이 만물의 근본이 된다는 사상도 나타났다. 『회남자(淮南子)』 내경(內經)에 “무릇 사시의 음양은 만물의 근본이다. 성인이 봄과 여름에 양을 기르고 가을과 겨울에 음을 기르는 까닭은 그 근본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만물과 더불어 생장(生長)의 문(門)에서 부침(浮沈)을 같이하는 것이다. 그 뿌리를 거역하면 근본을 베고[伐] 참[眞]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음양은 천지의 근본이요 만물의 기강이요 변화의 부모요 생살(生殺)의 시작이요 신명(神明)의 집이라는 말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음양의 도리 없이 만물의 생성 변화를 설명할 수는 없다. 소옹(邵雍)은 『관물외편(觀物外篇)』에서 “일음일양은 천지의 도(道)인데 물(物)은 음양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음양으로 말미암아 이룬다.”고 하였다.
⑵ 음양과 도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 도는 어디나 존재하고 만물의 근원이 되는데 그 도의 변화는 또한 음양으로 설명된다. 『주역』 계사전(繫辭傳)의 “일음 일양을 일컬어 도라 하는데, 그것을 이은 자는 선(善)하고 그것을 이룬 자를 성(性)이라 한다.”는 말에 잘 나타난다. 선하다고 한 것은 도덕적인 의미에서고, 성이라고 하는 것도 또한 도덕적인 행위의 바탕을 말하는 것이므로 도덕과 음양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로 설명된다.
이 이은 자는 선하고 그것을 이룬 자는 성이라는 것에 대해 주희(朱熹)는 더 설명해 모두 음양에 귀속시키고 “대개 천지 변화는 음이 없이 되는 것은 아니나 물(物)이 형태를 갖추지 않은 것은 양에 속하고, 물이 그 성을 바르게 하는 데 양이 없이 되는 것은 아니나 형기(形器)가 이미 정해지면 음에 속한다(朱子文集, 答廖子晦書).”고 말한다. 도덕적인 것과 천지 변화의 이치가 모두 마찬가지로 음양의 도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⑶ 음양의 성격 및 상호 관계
음과 양은 각각 홀로 독립되어 있을 수 없다. 음과 양은 서로 의존 관계에 있다. 그것을 소옹은 『관물』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양은 홀로 설 수 없고 반드시 음을 얻은 후에 설 수 있기 때문에 양은 음을 기(基)로 삼고, 음은 스스로 나타날 수 없어 반드시 양을 얻은 후에 나타나기 때문에 음은 양으로 창(唱)을 삼는다.”
그리고 음과 양의 성격에 관해, 음은 응결하고 모이는 성격이 있다면 양은 발산하는 성격이 있다고 한다. 구름에 비유해 말하면, 구름이 응결 · 응취하면 음이 되어 비가 내리게 되지만 만약 양을 만나면 그 구름이 흩어져 올라가게 될 것이다.
천둥과 번개는 음이 모여 흩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 음 안에 있는 양이 나갈 구멍을 잃고 막혀 있다가 별안간 음을 뚫고 밖으로 분출하는 현상을 말한다. 반대로 밖에 있는 양이 응취 · 응결해 있는 음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세찬 바람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회오리바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모든 자연 현상은 음양의 성격과 상호 작용을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다.
⑷ 음양과 오행
이상에서 말한 바대로 음양의 성격에 따라 여러 가지 상호 관계를 맺으면서 자연의 변화를 가져오는데, 그 변화의 여러 양상을 다섯 가지 유형으로 표현한 것이 오행이다. 오행의 행(行)은 도의 통칭으로도 말할 수 있다.
그 오행이 최초로 나타난 문헌은 『서경』 홍범(洪範)인데 그 가운데에서 오행은 수(水) · 화(火) · 목(木) · 금(金) · 토(土)로 표현되었다. 수는 순음(純陰)의 상태를 말하고, 목은 순음 가운데에서 최초로 태어난 양을 말하며, 화는 양이 자랄 대로 자라서 순양(純陽)인 상태를 말하고, 금은 순양 가운데에서 최초로 태어난 음을 말한다.
새로 태어난 음은 차츰 자라서 순음이 되고 음이 극하면 그 안에서 양을 낳으며, 그 양이 차츰 자라서 순양이 되고 양이 극하면 그 안에서 음을 낳으며, 그 음이 차츰 자라 순음이 된다. 이것을 순서대로 표시하면 수→목→화→금→(수)로 되풀이된다. 한편, 순음 중에서 양을, 순양 중에서 음을 탄생시키기 직전에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닌 순간을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을 토라 하고, 혹은 태극이라 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오행은 음양과 다른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음양의 변화에 의한 기화유행(氣化流行), 생생불식(生生不息)을 여러 각도에서 설명한 것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음양은 오행 중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