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4월 23일 평안남도 순천군(順天郡) 사인면(舍人面) 사인리(舍人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정찬성(鄭燦聖)이다.
장로교 간사로 활동하던 중, 1919년 12월 3일에 순천군 제현면(濟賢面) 문창리(文昌里)에 있는 개신교계 여학교에서 윤찬복(尹燦福), 최복길(崔福吉)과 함께 대한국민회부인향촌회(大韓國民會婦人鄕村會)를 조직하였다. 윤찬복과 최복길이 1919년 10월경 평양신학교 기숙사에서 대한국민회 총무 박승명(朴承明)으로부터 향촌회 조직을 권유받은 것이 결성의 계기이다. 회장은 윤찬복이 맡았고, 정찬성은 최복길과 함께 회계를 맡았다.
대한국민회부인향촌회는 1919년 9월 평양에서 결성된 대한국민회의 산하 기구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후원금을 모아 보내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덕균(韓德均), 김화자(金花子), 김양선(金良善), 방문식(方文植), 김건신(金健信), 김오복(金五福), 현도명(玄道明), 옥순영(玉淳永), 박은감(朴恩感), 이관옥(李觀沃), 이지윤(李志潤), 김경신(金敬信) 등 개신교 여성 신자의 가입을 받았다. 회원으로부터 4원씩 회비를 거두어 1원은 부인향촌회 운영 비용으로 사용하였으며, 나머지 금액은 모아두었다. 이렇게 모은 금액 60원을 1920년 5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차경신(車敬信)에게 전달하였다. 차경신은 일본 요코하마여자신학교에 재학하던 중 2·8독립선언식에 참석하고 김마리아와 함께 2·8독립선언서를 갖고 귀국한 인물이다. 1920년 8월부터는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기반을 두고 국내외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었다.
정찬성은 1921년 1월에 경찰에 조직이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같은 해 7월 2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제령(制令) 제7호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