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애순은 1919년 광주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광주 3·1운동에 참여한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1919년 3월 김강으로부터 독립선언문 50여 통을 전달받아 학생들에게 배포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을 설득하여 3월 10일 광주 장날에 20여 명을 데리고 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으며, 조사 후 기소되었다.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1896년 12월 23일 전라남도 목포부(木浦府) 양동(陽洞)에서 태어났다.
광주의 수피아여학교(須皮亞女學校)를 제1기로 졸업하고, 같은 학교의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9년 3월 6일 나주 사람 김복현(金福鉉)이 숭일학교(崇一學校) 교사 김강(金剛), 최병준(崔丙俊), 송흥진(宋興眞), 서정희(徐廷禧)와 함께 만세시위를 논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박애순은 김강으로부터 수피아여학교의 학생들을 만세시위에 동원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김강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에게 배포하며, 3월 10일 오후 3시 30분에 만세시위를 할 것을 알렸다. 학생들에게 『매일신보(每日新報)』 기사를 읽어주는 등 전국 각지의 독립운동 현황을 전하면서 이에 동참하자고 설득하였다.
3월 10일 오후 3시경 1,000명 이상의 군중이 장터에 결집한 가운데, 박애순도 수피아여학교 학생 20여 명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였다. 주도자들이 독립운동의 개시를 선언하자,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박애순은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대의 선두에서 만세를 불렀다. 시위 행렬이 광주지방법원을 지나 우체국 앞에 이르자 무장한 일본군 헌병대가 출동하여 100여 명을 체포하였으며, 오후 4시 30분경 시위 군중을 해산시켰다.
박애순은 이후 일본 경찰에 붙잡혀 조사 후 기소되었다.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6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