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봉윤은 일제강점기 버클리대학교 동양어학부 교수를 역임하고,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30년 평양에서 평양기독학생종교부회총합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맡았다. 이후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기독교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일맥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8년 미국 이주 후에는 국어 교육에 앞장섰으며, 버클리대학교 동양어학부 최초 한인 교수가 되었다. 1941년부터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 관료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남북통일 방략으로 한반도 영세중립화를 제안하였다.
평안북도 의주군 출신이며, 1914년 5월 25일에 태어났다. 가정 환경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다.
1930년 평양에서 학생으로 재학 중, 지역 내 다섯 학교의 종교부를 통일하여 평양기독학생종교부회총합회(平壤基督學生宗敎部會總合會)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성경학교 및 수양회를 개최하여 한글을 가르치는 등 문맹퇴치운동과 민족정신 고취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5년 일본 도쿄[東京]로 유학을 떠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신학부에 입학하였다. 일본에서 기독교 학생을 중심으로 한 일맥회(一麥會)라는 민족주의 그룹에 가입하였으며, 시국간담회 등을 통해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이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938년 미국 이주 후 국어 관련 교육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국어학교 교사로 활동하였으며, 대한인국민회 국어 교과서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버클리대학교[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동양어학부 최초 한인 교수로서 조선어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941년 2월에는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레스에서 변준호(卞俊鎬), 최능익(崔能翊) 등이 결성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미주후원회에 가입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소장파들이 중국 한커우[漢口]에서 결성한 항일운동 단체이다. 1941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주 한인 단체 대표들이 모여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를 개최하고, 그해 8월 연합 단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를 조직하였다. 이때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도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5월 중국의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됨에 따라,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가 1943년 1월에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미주지부로 개칭되었다. 같은 해 9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의 기관지 『독립(獨立)』이 창간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한편, 1942년 2월에 일명 맹호군(猛虎軍)으로 불린 한인국방경위대(韓人國防警衛隊)가 창설되자, 입대하여 군사 훈련을 받으며 대일 항전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의 관료가 되어 귀국하였다. 미군정 공보부여론국 정치교육과에서 군정을 대변하는 자료를 만들고 민주주의를 보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김규식, 안재홍 등의 정치인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이승만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1948년 8월 미국으로 돌아간 후 한국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민족 통일관을 정리하였다. 특히 남북통일 방략의 일환으로 '한반도 영세중립화'를 제안하였다. 미국, 소련, 중국, 일본에 의해 한반도의 영세 중립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흥사단계 중간파의 의식을 계승 · 발전시킨 것이다.
최봉윤은 여러 저서를 남겼는데, 국내에서는 『미국 속의 한국인』[1983]이 잘 알려져 있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