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숙은 일제강점기 흥사단에서 활동하고 한국 여성 최초로 스웨덴에서 유학한 신여성이다. 1905년 12월 경기도 여주군에서 태어났다. 이화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중국 난징으로 유학을 갔다. 1924년 흥사단 원동위원회가 난징으로 이전하자, 입단하여 정식 단원이 되었다. 1926년 3월 난징 회문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7월 스웨덴으로 유학을 갔다. 시그투나 인민학교를 거쳐 1928년부터 사회정치와 정책연구소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1931년 귀국하였으며,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1932년 4월 사망하였다.
1905년 12월 19일 경기도 여주군에서 태어났다.
여주공립보통학교와 이화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23년 9월 중국 난징[南京] 명덕학교에 입학해 1년간 공부하였다. 1924년 9월 난징 회문여자중학교로 옮겼고, 1926년 3월 졸업하였다.
한편, 1924년 3월 흥사단 원동위원회가 난징으로 이전하자, 5월에 흥사단 예비 단원으로 입단하였다. 흥사단이 요구하는 동맹독서, 동맹저금, 동맹체육, 통상보고 의무를 이행하고 1925년 1월 정식 단원이 되었다.
당시 동아시아 신여성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스웨덴 출신 여성운동가 엘렌 케이(Ellen Key)를 흠모하던 최영숙은 1926년 7월 스웨덴으로 유학을 갔다. 스웨덴 여성 기독교 단체인 KFUK[Kristliga Föreningen av Unga Kvinnor]의 도움으로 시그투나 인민학교에서 1년간 스웨덴어 등을 공부하였다. 그 후 스톡홀름대학에 입학하려 하였지만, 요구 학점 미달로 입학하지 못하였다. 대신 스톡홀름대학과 관련된 '사회정치와 정책연구소'에 1928년 입학하였으며, 1930년 6월 졸업하였다. 그곳에서 실용주의적 사회경제학 교육을 받았다.
최영숙은 외국어 교사와 자수, 잡지 · 신문 기사 투고 등을 통해 유학에 필요한 생활비를 조달하였다. 일제의 식민 지배와 식민지하 조선의 부당한 현실을 시그투나 인민학교 잡지와 스웨덴 신문에 기고하여 알렸고, 또 여러 차례 강연회를 통해 소개하기도 하였다. 1928년 1월에는 평화와 자유를 위한 국제여성연맹[Intanationella Kvinnoförbundets för fred och frihet]의 정기 회의에 참가하였으며, 스위스 대표인 페미니스트 마리 쉽생크스(Mary Sheepshanks, 1872~1960)와 회견하였다. 스페인어와 독일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1931년 11월 이집트와 인도를 거쳐 귀국하였다. 인도 여행 경험을 담은 여행기를 『삼천리』[^1]와 주2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1932년 1월 초, 신간회 해소 후 대안과 관련하여 『동아일보』가 기획한 「민족적 중심단체 재조직의 필요와 방법」 시리즈 대담에 응하였다. 그녀는 민족적 중심의 존립이 필요하고, 그 중심이 민족적 경제생활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면서, 민족적 경제생활의 옹호와 보장을 대조건으로 하자고 주장하였다. 1932년 1월 말에는 『기독신문』 평남지국 주최 경제강연회에서 강연하였다. 김활란(金活蘭)의 부탁으로 『공민독본(公民讀本)』 편찬을 맡기도 하였다.
한편, 인도에서 조선인을 아버지로 둔 혼혈 인도 청년과 결혼하였다고 한다. 임신에도 불구하고 홀로 귀국하였으나, 안정된 직장을 구하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렸다. 이로 인해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면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1932년 4월 23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