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석 초상」은 대지에 붙어 있고, 양쪽에는 오세창이 쓴 사진에 관한 기록이 있다. 사진 오른쪽에는 '선부군 사십이세, 고종구년 임신 사진, 세창기(先附君四十二歲 高宗九年壬申寫眞世昌記)'라고 적었고 밑에 주1을 찍었으며, 사진 왼쪽에는 '북경 법국 공사관 참찬관 매휘립 촬영, 불초 재 동경 복사본(北京 法國公使館參贊官梅輝立撮影 不肖在東京複寫本)'이라고 썼다. 돌아가신 부친이 42세 때인 고종 9년 임신년 즉 1872년에 찍은 사진으로 내용은 오세창 자신이 쓴 글이며, 북경의 프랑스[法國] 공사관 참찬관인 매휘립(梅輝立)이 촬영했고 자신이 동경에 있을 때 복사한 복사본이라는 내용이다. 오세창은 부친의 사진을 일본에 갈 때 다른 물건과 함께 가져갔으나 불행하게도 원래의 사진은 손실되었고, 다행히 일본 도쿄(東京)에서 복사한 복사본이 있어 남겼다고 증언했다.
1872년 조선 정부는 1871년에 일어난 신미양요(辛未洋擾)의 전후 문제 처리와 관련하여 박규수(朴珪壽)를 정사로 한 사절단을 청나라에 파견했다. 오경석은 이 사절단의 수석 역관으로 사행을 했다. 박규수의 귀국 보고에도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이들은 북경에 체류하는 동안 프러시아와 프랑스와의 전쟁을 둘러싼 유럽의 정세, 중국내의 유럽과 미국인 동향에 대해 상세한 정보 등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수석 역관인 오경석이 서양 공사관원들을 비롯한 외국인들과의 접촉을 도맡았는데, 사진가로 적시한 매휘립 즉 메이어스(Mayers)란 청국 주재 영국공사관의 참찬관(參贊官)은 이런 과정에서 만났고, 그의 카메라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사진을 찍은 메이어스[William Frederick Mayers, 1831~1878]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생으로 아버지가 영국의 호주총독 비서였던 인연으로 12세에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귀화하였다. 미국으로 건너가 매스컴 분야에서 일하다가 1859년 중국에 왔으며, 1860년 베이징 주재 영국공사관에 특채되었다. 영국의 중국 전문가로 Introduction of Cotton into China[1868], Chinese Reader's Manual[1874], The Chinese Government: A Manual of Chinese Titles, Categorically Arranged and Explained[1878], Treaties between the Empire of China and Foreign Powers[1877] 등 중국 관련 연구서를 집필한 학자이기도 했다.
사진의 주인공은 개항기 역관 출신의 개화사상가 오경석이다. 아들은 한국 서화 역사의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의 저자인 오세창(吳世昌)이다. 그래서인지 비록 복사본일지라도 부친의 사진을 잘 건사하고 발문까지 붙여 가족의 유산으로 남기고 있다. 덕분에 오경석의 사진은 명확한 기록에 따른 우리나라 최초의 초상사진으로 오랫동안 공인받아 왔다. 다만 1863년 이조판서였던 이의익(李宜翼)을 정사(正使)로 하는 삼절년공행(三節年貢行) 연행사절단이 북경에 가서 찍은 사진들이 발견되어 한국 사람이 찍힌 최초의 것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럼에도 개항기 조선 외교의 상황과 역관의 역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사료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