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낙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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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고분은 고대 한사군의 중심지인 낙랑군에서 조성되었던 무덤이다. 대동강 유역에서 확인되는 고분으로 널무덤[木棺墓]와 덧널무덤[木槨墓], 벽돌방무덤[塼室墓] 등이 있다. 특히 평양 근교 토성리에는 1,300여 개의 고분이 산재해 있다. 같은 시기 한반도에 존재했던 국가들의 묘제와는 현저히 다른 특징을 보이며 중국 한나라 문화를 대변하는 고분이다. 토기·동기·철기·도기(陶器)·옥기(玉器)·목기(木器)·칠기(漆器)·장신구·문방구·인(印)·명기(明器) 등 다양한 껴묻거리가 발굴되었다.
낙랑고분 (樂浪古墳)
낙랑고분은 고대 한사군의 중심지인 낙랑군에서 조성되었던 무덤이다. 대동강 유역에서 확인되는 고분으로 널무덤[木棺墓]와 덧널무덤[木槨墓], 벽돌방무덤[塼室墓] 등이 있다. 특히 평양 근교 토성리에는 1,300여 개의 고분이 산재해 있다. 같은 시기 한반도에 존재했던 국가들의 묘제와는 현저히 다른 특징을 보이며 중국 한나라 문화를 대변하는 고분이다. 토기·동기·철기·도기(陶器)·옥기(玉器)·목기(木器)·칠기(漆器)·장신구·문방구·인(印)·명기(明器) 등 다양한 껴묻거리가 발굴되었다.
김부식은 고려전기 직한림, 추밀원부사, 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075년(문종 29)에 태어나 1151년(의종 5)에 사망했다. 신라 무열왕의 후손으로, 송의 서긍조차도 박학다식하여 글을 잘 짓고 고금을 잘 알아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고 평할 정도였다. 묘청의 난 때 원수로 임명되어 직접 중군을 거느리고 삼군을 지휘 통솔하여 난을 진압했다. 본인이 주도한 윤언이·한유충 등의 지방좌천 인사가 번복되자 정치보복을 염려하여 세 번 사직상소를 올리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인종의 명에 따라 50권의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바쳤다.
김부식 (金富軾)
김부식은 고려전기 직한림, 추밀원부사, 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075년(문종 29)에 태어나 1151년(의종 5)에 사망했다. 신라 무열왕의 후손으로, 송의 서긍조차도 박학다식하여 글을 잘 짓고 고금을 잘 알아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고 평할 정도였다. 묘청의 난 때 원수로 임명되어 직접 중군을 거느리고 삼군을 지휘 통솔하여 난을 진압했다. 본인이 주도한 윤언이·한유충 등의 지방좌천 인사가 번복되자 정치보복을 염려하여 세 번 사직상소를 올리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인종의 명에 따라 50권의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바쳤다.
대승은 고구려 잠지락의 대가로서 47년(민중왕 4) 1만여 명의 무리와 함께 낙랑군에 투항하였다. 대승이 거느린 잠지락이라는 집단은 약 1만 명 규모였는데, 삼한의 소국에 비견되기도 한다. 이러한 규모의 정치체 3~4개가 하나의 나부를 구성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승 (戴升)
대승은 고구려 잠지락의 대가로서 47년(민중왕 4) 1만여 명의 무리와 함께 낙랑군에 투항하였다. 대승이 거느린 잠지락이라는 집단은 약 1만 명 규모였는데, 삼한의 소국에 비견되기도 한다. 이러한 규모의 정치체 3~4개가 하나의 나부를 구성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미천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15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300~331년이다. 서천왕의 손자로 아버지가 봉상왕에 의해 반역혐의로 죽임을 당하자 피신해 소금장수를 하며 살다가 봉상왕 폐위 후 국상 창조리 등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다. 재위 중에 중국 진나라가 와해되는 국제적 격동기를 맞아 대외팽창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낙랑군과 대방군을 병합했고 현도성을 공격하는 등 남방으로 급속한 팽창을 도모했다. 선비족 일파인 모용부와 요동지방을 두고 오랫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다. 재위 32년 만에 죽자 미천지원에 장사 지냈다.
미천왕 (美川王)
미천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15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300~331년이다. 서천왕의 손자로 아버지가 봉상왕에 의해 반역혐의로 죽임을 당하자 피신해 소금장수를 하며 살다가 봉상왕 폐위 후 국상 창조리 등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다. 재위 중에 중국 진나라가 와해되는 국제적 격동기를 맞아 대외팽창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낙랑군과 대방군을 병합했고 현도성을 공격하는 등 남방으로 급속한 팽창을 도모했다. 선비족 일파인 모용부와 요동지방을 두고 오랫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다. 재위 32년 만에 죽자 미천지원에 장사 지냈다.
봉산송산리고분(鳳山松山里古墳)은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벽돌무덤 · 덧널무덤으로 이루어진 낙랑군의 무덤군이다. 1917년 송산리 제1호분이라는 이름으로 야쓰이 세이이쓰에 의해 조사되었으나 정식 보고는 되지 않았으며, 광복 이후 북한이 봉산송산리고분에서 발굴한 덧널무덤이 동일한 고분군인지는 검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송산리에서 덧널무덤과 벽돌무덤이 발견된 점은 대방군 지역으로 이해되는 봉산군 일대의 주요 무덤 형태와 일치하고 있다. 대방군치지라 알려진 고당성 동북쪽에 있어 대방군 관련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봉산 송산리 고분 (鳳山 松山里 古墳)
봉산송산리고분(鳳山松山里古墳)은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벽돌무덤 · 덧널무덤으로 이루어진 낙랑군의 무덤군이다. 1917년 송산리 제1호분이라는 이름으로 야쓰이 세이이쓰에 의해 조사되었으나 정식 보고는 되지 않았으며, 광복 이후 북한이 봉산송산리고분에서 발굴한 덧널무덤이 동일한 고분군인지는 검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송산리에서 덧널무덤과 벽돌무덤이 발견된 점은 대방군 지역으로 이해되는 봉산군 일대의 주요 무덤 형태와 일치하고 있다. 대방군치지라 알려진 고당성 동북쪽에 있어 대방군 관련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봉산양동리고분군(鳳山養洞里古墳群)은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낙랑군의 무덤군이다. 1917년과 1922년에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으나 전모가 알려진 것은 양동리 3 · 5호분이다. 양동리 3 · 5호분은 방대형 분구와 궁륭형 천장의 전형적인 낙랑계 벽돌무덤이다. 출토된 각종 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피장자는 군현에서 활동한 인물로 추정된다. 무덤의 구조나 토기의 양상으로 보아 양동리 3 · 5호분의 추정 연대는 3세기 전반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지역에 축조된 벽돌무덤의 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봉산 양동리 고분군 (鳳山 養洞里 古墳群)
봉산양동리고분군(鳳山養洞里古墳群)은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에 있는 낙랑군의 무덤군이다. 1917년과 1922년에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으나 전모가 알려진 것은 양동리 3 · 5호분이다. 양동리 3 · 5호분은 방대형 분구와 궁륭형 천장의 전형적인 낙랑계 벽돌무덤이다. 출토된 각종 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피장자는 군현에서 활동한 인물로 추정된다. 무덤의 구조나 토기의 양상으로 보아 양동리 3 · 5호분의 추정 연대는 3세기 전반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지역에 축조된 벽돌무덤의 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고려전기 제6대 성종의 제3왕비.
연창궁부인 (延昌宮夫人)
고려전기 제6대 성종의 제3왕비.
초기국가시대 삼한시대 염사(廉斯)의 우거수를 역임한 군장.
염사치 (廉斯鑡)
초기국가시대 삼한시대 염사(廉斯)의 우거수를 역임한 군장.
북한 평양직할시 락랑구역에 있는 초기국가시대 관모·띠고리 등이 출토된 덧널무덤. 목곽묘.
왕광묘 (王光墓)
북한 평양직할시 락랑구역에 있는 초기국가시대 관모·띠고리 등이 출토된 덧널무덤. 목곽묘.
북한 평양직할시 락랑구역에 있는 초기국가시대 장신구와 무기류 등이 출토된 덧널무덤. 목곽묘.
왕근묘 (王根墓)
북한 평양직할시 락랑구역에 있는 초기국가시대 장신구와 무기류 등이 출토된 덧널무덤. 목곽묘.
왕우묘(王旴墓)는 평양직할시 락랑구역 석암동에 있는 왕우의 무덤으로 알려진 낙랑군의 귀틀무덤이다. 일명 '대동석암리205호분'이라고도 한다. 1925년 도쿄제국대학 문학부의 사업으로 발굴이 실시되었다. 동혈합장 귀틀무덤으로 출토 유물은 토기류, 금공품류, 청동기류, 칠기류로 세분할 수 있다. 특히 왕우인신(王旴印信)이 새겨진 목제 양면인이 출토되어 무덤의 주인공이 왕우임을 알 수 있다. 무덤의 형식과 출토 유물로 미루어 보면, 1세기 중반에 조영되어 1세기 후반까지 세 번의 추가장이 이루어진 낙랑 최고위급 인물의 무덤으로 판단된다.
왕우묘 (王旴墓)
왕우묘(王旴墓)는 평양직할시 락랑구역 석암동에 있는 왕우의 무덤으로 알려진 낙랑군의 귀틀무덤이다. 일명 '대동석암리205호분'이라고도 한다. 1925년 도쿄제국대학 문학부의 사업으로 발굴이 실시되었다. 동혈합장 귀틀무덤으로 출토 유물은 토기류, 금공품류, 청동기류, 칠기류로 세분할 수 있다. 특히 왕우인신(王旴印信)이 새겨진 목제 양면인이 출토되어 무덤의 주인공이 왕우임을 알 수 있다. 무덤의 형식과 출토 유물로 미루어 보면, 1세기 중반에 조영되어 1세기 후반까지 세 번의 추가장이 이루어진 낙랑 최고위급 인물의 무덤으로 판단된다.
은율관산리고분(殷栗冠山里古墳)은 황해남도 은율군 은율읍 관산리에 있는 낙랑군 · 대방군 시기의 고분군이다. 관광산 남사면에 분포하는 21기의 고분으로 이루어졌다. 그 중 관광산 자락 남쪽에 자리한 고분 2기를 북한에서 조사하였다. 관산리1호분과 2호분은 지상에 봉토분구를 가진 천장까지 벽돌로 축조한 벽돌무덤이다. 서북한 일대의 벽돌무덤과 비교해 볼 때 이 무덤은 2세기 중엽에서 3세기 대에 조성된 낙랑군 · 대방군 시기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은율 관산리 고분 (殷栗 冠山里 古墳)
은율관산리고분(殷栗冠山里古墳)은 황해남도 은율군 은율읍 관산리에 있는 낙랑군 · 대방군 시기의 고분군이다. 관광산 남사면에 분포하는 21기의 고분으로 이루어졌다. 그 중 관광산 자락 남쪽에 자리한 고분 2기를 북한에서 조사하였다. 관산리1호분과 2호분은 지상에 봉토분구를 가진 천장까지 벽돌로 축조한 벽돌무덤이다. 서북한 일대의 벽돌무덤과 비교해 볼 때 이 무덤은 2세기 중엽에서 3세기 대에 조성된 낙랑군 · 대방군 시기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 평양직할시 만경대구역에 있는 철기시대 서기전 1세기∼서기 1세기의 움무덤. 토광묘.
평양 만경대 고분 (平壤 萬景臺 古墳)
북한 평양직할시 만경대구역에 있는 철기시대 서기전 1세기∼서기 1세기의 움무덤. 토광묘.
황주금석리유적(黃州金石里遺蹟)은 황해북도 황주군 금석리에 있는 낙랑군 설치 직후 조영된 덧널무덤이다. 덧널무덤 바닥에서 쇠뇌 방아쇠, 세형동검, 청동 고리 등 각종 청동기를 비롯하여 철제 차축두, 쇠투겁창, 단조 쇠도끼 등 철기와 함께 재지적 성격이 강한 승문타날 짧은목항아리가 출토되었다. 출토 유물로 보아 피장자는 재지의 상위계층 인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몇몇 청동기가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볼 수 있어 낙랑군이 설치된 직후에 조영되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황주 금석리 유적 (黃州 金石里 遺蹟)
황주금석리유적(黃州金石里遺蹟)은 황해북도 황주군 금석리에 있는 낙랑군 설치 직후 조영된 덧널무덤이다. 덧널무덤 바닥에서 쇠뇌 방아쇠, 세형동검, 청동 고리 등 각종 청동기를 비롯하여 철제 차축두, 쇠투겁창, 단조 쇠도끼 등 철기와 함께 재지적 성격이 강한 승문타날 짧은목항아리가 출토되었다. 출토 유물로 보아 피장자는 재지의 상위계층 인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몇몇 청동기가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볼 수 있어 낙랑군이 설치된 직후에 조영되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황주선봉리고분(黃州仙峰里古墳)은 황해북도 황주군 선봉리에 있는 원삼국시대 낙랑군의 무덤이다. 방대형의 봉토가 있는 긴 축 남북 방향의 세장방형 나무널무덤으로 확인되었고, 내부에서 금동관못, 각종 구슬, 동한 시기로 추정되는 말종방울과 오수전이 발견되었다. 이에 따라 무덤 축조 시기는 서기 1~2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낙랑군의 고분 문화가 대동강과 재령강의 주변으로 널리 확산되었음을 보여 준다.
황주 선봉리 고분 (黃州 仙峰里 古墳)
황주선봉리고분(黃州仙峰里古墳)은 황해북도 황주군 선봉리에 있는 원삼국시대 낙랑군의 무덤이다. 방대형의 봉토가 있는 긴 축 남북 방향의 세장방형 나무널무덤으로 확인되었고, 내부에서 금동관못, 각종 구슬, 동한 시기로 추정되는 말종방울과 오수전이 발견되었다. 이에 따라 무덤 축조 시기는 서기 1~2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낙랑군의 고분 문화가 대동강과 재령강의 주변으로 널리 확산되었음을 보여 준다.
현도군은 중국 한나라가 설치한 군으로서 한사군의 하나이다. 위만조선이 멸망한 이후에 낙랑군·진번군·임둔군과 함께 설치되었다가 임둔군·진번군이 폐지될 때 진번군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압록강 중류에 있던 군치(郡治)가 요동 혼하(渾河) 상류로 이동하였는데, 한인의 압박정치에 대한 토착인의 반발이 심해졌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현도군의 강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대체로 넓은 충적지대가 펼쳐져 있는 압록강 중·상류 일대로 추정된다. 최근에는 현도군은 물론 한사군 모두가 요하(遼河) 서쪽 지역에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현도군 (玄菟郡)
현도군은 중국 한나라가 설치한 군으로서 한사군의 하나이다. 위만조선이 멸망한 이후에 낙랑군·진번군·임둔군과 함께 설치되었다가 임둔군·진번군이 폐지될 때 진번군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압록강 중류에 있던 군치(郡治)가 요동 혼하(渾河) 상류로 이동하였는데, 한인의 압박정치에 대한 토착인의 반발이 심해졌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현도군의 강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대체로 넓은 충적지대가 펼쳐져 있는 압록강 중·상류 일대로 추정된다. 최근에는 현도군은 물론 한사군 모두가 요하(遼河) 서쪽 지역에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