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대동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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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8년간 한반도에 존재한 왕조 국가이다. 국왕의 밑에서 양반관료들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어 정치를 행하였다. 농업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자연경제체계가 강하였고, 양반 중심 세습신분제 사회였으나,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속에 신분제는 차츰 이완되어 갔다. 유교 문화의 위세가 계속 강해지는 가운데 서민과 여성들은 고유성을 강인하게 지켜 나갔다.
조선 (朝鮮)
조선은 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8년간 한반도에 존재한 왕조 국가이다. 국왕의 밑에서 양반관료들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어 정치를 행하였다. 농업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자연경제체계가 강하였고, 양반 중심 세습신분제 사회였으나,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속에 신분제는 차츰 이완되어 갔다. 유교 문화의 위세가 계속 강해지는 가운데 서민과 여성들은 고유성을 강인하게 지켜 나갔다.
공납은 정치 수장이 천신이나 농업신에게 제향하기 위해 수확물을 거두어 바치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상서』 우공편과 『주례』 지관사도편에서 임토작공(任土作貢)의 원리와 부세로서의 관념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공납은 당의 조용조(租庸調) 제도에 편입돼 조(調)로 운영됐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공납제를 도입해 재정 운영에 활용했는데 백성들의 부담이 컸다. 조선 건국 초 현물 공납제를 대대적으로 정비했으나 15세기 말부터 다시 폐단이 야기돼 공물 변통 논의가 전개되는 가운데, 결국 조선 후기 대동법으로 개편되었다.
공납 (貢納)
공납은 정치 수장이 천신이나 농업신에게 제향하기 위해 수확물을 거두어 바치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상서』 우공편과 『주례』 지관사도편에서 임토작공(任土作貢)의 원리와 부세로서의 관념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공납은 당의 조용조(租庸調) 제도에 편입돼 조(調)로 운영됐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공납제를 도입해 재정 운영에 활용했는데 백성들의 부담이 컸다. 조선 건국 초 현물 공납제를 대대적으로 정비했으나 15세기 말부터 다시 폐단이 야기돼 공물 변통 논의가 전개되는 가운데, 결국 조선 후기 대동법으로 개편되었다.
대동법 시행을 계기로 선혜청과 호조 등 중앙의 재무 관서에서 공물가를 지급받아 왕실과 정부 관서에 경비 물자를 조달하던 청부 상인을 일컫는다. 대동법 시행 초기에는 주인층이 주를 이루었으나, 대동법이 전국에 확대 시행되면서 시전, 공장, 기인, 역인층 등이 공물 주인화되었으며, 국역 및 특정 물품을 조달하기 위한 공계가 창설되기도 했다. 공인들 중에는 한정된 공물가로 정부에서 요구하는 공물 및 각종 역을 수행해야 하는 부담으로 조달 시장에서 이탈하는 자도 있었지만, 통공 정책 이후 사상 도고로 성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공인 (貢人)
대동법 시행을 계기로 선혜청과 호조 등 중앙의 재무 관서에서 공물가를 지급받아 왕실과 정부 관서에 경비 물자를 조달하던 청부 상인을 일컫는다. 대동법 시행 초기에는 주인층이 주를 이루었으나, 대동법이 전국에 확대 시행되면서 시전, 공장, 기인, 역인층 등이 공물 주인화되었으며, 국역 및 특정 물품을 조달하기 위한 공계가 창설되기도 했다. 공인들 중에는 한정된 공물가로 정부에서 요구하는 공물 및 각종 역을 수행해야 하는 부담으로 조달 시장에서 이탈하는 자도 있었지만, 통공 정책 이후 사상 도고로 성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요역은 국가가 백성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징발하던 수취 제도이다. 고려시대부터는 16~60세의 장정에게 부과되었는데, 고려 말 상요(常徭)가 늘어 큰 사회 문제가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 1428년(세종 10) 토지 규모를 계산해 역부를 차출하는 계전법이 시행됐으며, 1471년(성종 2)에는 역민식이 제정돼 팔결 작부와 연 6일의 역역 규정이 마련됐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군역의 대립화, 방군수포화 경향이 나타나면서 요역제 역시 형해화됐다. 이에 대동법 시행 이후 요역제는 역가를 지급하는 급가고립제로 전환되었다.
요역 (徭役)
요역은 국가가 백성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징발하던 수취 제도이다. 고려시대부터는 16~60세의 장정에게 부과되었는데, 고려 말 상요(常徭)가 늘어 큰 사회 문제가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 1428년(세종 10) 토지 규모를 계산해 역부를 차출하는 계전법이 시행됐으며, 1471년(성종 2)에는 역민식이 제정돼 팔결 작부와 연 6일의 역역 규정이 마련됐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군역의 대립화, 방군수포화 경향이 나타나면서 요역제 역시 형해화됐다. 이에 대동법 시행 이후 요역제는 역가를 지급하는 급가고립제로 전환되었다.
방납은 조선시대에 값을 받고 각 읍에서 바쳐야 할 공물(貢物)을 대신 마련하여 바치던 행위이다. 문제는 방납인들에게 지급하는 공물 대납가가 지나치게 높다는 것이었다. 중앙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불필요한 공물을 없애거나 줄이는 공안 개정을 추진하였으며, 지방 군현에서는 수령의 주관 아래 사대동(私大同)을 실시하여 고을민들에게 현물 대신 쌀을 거두어 공물을 조달하였다. 사대동의 관행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경기선혜법을 시행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방납 (防納)
방납은 조선시대에 값을 받고 각 읍에서 바쳐야 할 공물(貢物)을 대신 마련하여 바치던 행위이다. 문제는 방납인들에게 지급하는 공물 대납가가 지나치게 높다는 것이었다. 중앙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불필요한 공물을 없애거나 줄이는 공안 개정을 추진하였으며, 지방 군현에서는 수령의 주관 아래 사대동(私大同)을 실시하여 고을민들에게 현물 대신 쌀을 거두어 공물을 조달하였다. 사대동의 관행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경기선혜법을 시행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공물은 당의 조용조(租庸調)를 변용한 수취 제도로,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수취 기록이 확인된다. 고려시대에는 민간에서 바치는 상공과 소 등에서 별도로 바치는 별공이 존재했다. 고려 말 상공, 잡요 등 무분별한 수취가 늘면서 공납제 전반에 폐단이 초래됐다. 이에 조선 건국 후 군현마다 공물의 종류와 수량을 공안에 명시하고 관비와 민비 공물로 나누어 수취하는 등 공납제 개선 조치가 이어졌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방납의 폐단과 중앙 관리의 점퇴, 추가 징수 등의 문제로 백성의 부담이 늘면서 현물 공납제는 대동법으로 전환되었다.
공물 (貢物)
공물은 당의 조용조(租庸調)를 변용한 수취 제도로,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수취 기록이 확인된다. 고려시대에는 민간에서 바치는 상공과 소 등에서 별도로 바치는 별공이 존재했다. 고려 말 상공, 잡요 등 무분별한 수취가 늘면서 공납제 전반에 폐단이 초래됐다. 이에 조선 건국 후 군현마다 공물의 종류와 수량을 공안에 명시하고 관비와 민비 공물로 나누어 수취하는 등 공납제 개선 조치가 이어졌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방납의 폐단과 중앙 관리의 점퇴, 추가 징수 등의 문제로 백성의 부담이 늘면서 현물 공납제는 대동법으로 전환되었다.
공부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대동법 성립 이전까지 중앙정부가 각 군현에 부과하여 수취한 현물이자 중앙정부의 현물 수취 체계이다. 전조(田租)와 함께 중앙 재정의 양대 영역이었다. 태종 대 공부를 개혁하여 조(租) · 용(庸) · 조(調) 가운데 조(調)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정립되었다.
공부 (貢賦)
공부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대동법 성립 이전까지 중앙정부가 각 군현에 부과하여 수취한 현물이자 중앙정부의 현물 수취 체계이다. 전조(田租)와 함께 중앙 재정의 양대 영역이었다. 태종 대 공부를 개혁하여 조(租) · 용(庸) · 조(調) 가운데 조(調)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정립되었다.
경저(京邸)는 고려시대 이래 지방 고을에서 행정 업무를 위해 서울에 설치한 연락 사무소이다. 고려시대에는 개성에 경저가 설치되어 지방에서 차출된 경주인(京主人)이 이곳에서 근무했다. 경저에서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부세, 공물을 관리하고 서울에 올라온 고을민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한편 연락 사무를 병행했다. 처음에는 잡다한 역의 부과로 경주인에 차출되는 것을 꺼렸으나 경주인이 경저를 기반으로 공물 조달에 참여해 이익을 얻게 되자 조선 후기에는 경주인 자리가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경저 (京邸)
경저(京邸)는 고려시대 이래 지방 고을에서 행정 업무를 위해 서울에 설치한 연락 사무소이다. 고려시대에는 개성에 경저가 설치되어 지방에서 차출된 경주인(京主人)이 이곳에서 근무했다. 경저에서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부세, 공물을 관리하고 서울에 올라온 고을민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한편 연락 사무를 병행했다. 처음에는 잡다한 역의 부과로 경주인에 차출되는 것을 꺼렸으나 경주인이 경저를 기반으로 공물 조달에 참여해 이익을 얻게 되자 조선 후기에는 경주인 자리가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
경기도 평택시에 있는 조선후기 대동법 시행 기념비.
대동법 시행기념비 (大同法 施行記念碑)
경기도 평택시에 있는 조선후기 대동법 시행 기념비.
장문(場門)은 조선시대에 지방 군현에서 열렸던 정기 시장이다. 초기에는 한 달에 2번 열리다가, 17세기 이후 전국적으로 장시가 발달하면서 주로 5일마다 개설되었다. 15세기 말 전라도에 극심한 흉년으로 기민이 늘자 이를 구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장시를 처음 허가하여 주었는데, 이를 계기로 장시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조선 후기 들어 대동법의 시행과 화폐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조선 말기까지 대략 1,000여 개의 장시가 형성되었다. 이에 장시는 향촌의 정보 전달 기능과 놀이 문화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장문 (場門)
장문(場門)은 조선시대에 지방 군현에서 열렸던 정기 시장이다. 초기에는 한 달에 2번 열리다가, 17세기 이후 전국적으로 장시가 발달하면서 주로 5일마다 개설되었다. 15세기 말 전라도에 극심한 흉년으로 기민이 늘자 이를 구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장시를 처음 허가하여 주었는데, 이를 계기로 장시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조선 후기 들어 대동법의 시행과 화폐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조선 말기까지 대략 1,000여 개의 장시가 형성되었다. 이에 장시는 향촌의 정보 전달 기능과 놀이 문화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잡역은 고려시대 · 조선시대에 지방 관아에서 일반 농민에게 부과하던 요역(徭役)이다. 잡역은 중앙적 요역보다 규모는 작지만, 지방 관부의 필요에 따라 종류가 잡다하다는 특징이 있다. 잡역의 물납제는 고려 후기에는 보편적이지 않았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 잡역세 징수를 배경으로 대납 · 고립이 가능해졌다.
잡역 (雜役)
잡역은 고려시대 · 조선시대에 지방 관아에서 일반 농민에게 부과하던 요역(徭役)이다. 잡역은 중앙적 요역보다 규모는 작지만, 지방 관부의 필요에 따라 종류가 잡다하다는 특징이 있다. 잡역의 물납제는 고려 후기에는 보편적이지 않았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 잡역세 징수를 배경으로 대납 · 고립이 가능해졌다.
인징은 조선 후기에 각종 부세를 납부하지 못하였거나 납부 대상자가 사망 · 도망하여 징수할 곳이 사라진 경우 그 이웃에게 대신 징수하는 방식이다. 지방 관청에서는 과세 대상자가 체납할 시 그 이웃에게 대신 징수하는 방법으로 미납분을 채워나갔는데, 이를 인징(隣徵)이라 한다. 인징은 당면한 재정 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장기적으로 향촌 사회 전반이 피폐해지는 요인이 되었다.
인징 (隣徵)
인징은 조선 후기에 각종 부세를 납부하지 못하였거나 납부 대상자가 사망 · 도망하여 징수할 곳이 사라진 경우 그 이웃에게 대신 징수하는 방식이다. 지방 관청에서는 과세 대상자가 체납할 시 그 이웃에게 대신 징수하는 방법으로 미납분을 채워나갔는데, 이를 인징(隣徵)이라 한다. 인징은 당면한 재정 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장기적으로 향촌 사회 전반이 피폐해지는 요인이 되었다.
대동상정법은 조선 후기에 함경도 · 강원도 · 황해도에서 실시되었던 변형된 대동법(大同法)이다. 이 지역들은 자연환경 때문에 농업 생산력의 발달이 더딘 지역으로 곡식 생산량이 불안정하고 도내에서도 농업 생산의 지역별 편차가 컸다. 이런 조건에서 경작지에 균일하고 일정한 과세액을 정하기는 어려웠다. 대동상정법은 현물납을 전세화했다는 점에서 대동법의 일환이었고, 군현별 경작지 사정에 따라 수취액을 달리했다는 점에서 대동법과는 차이를 보인다. 대동상정법도 대동법처럼 1894년 갑오개혁 후 지세제(地稅制)가 실시되면서 지세에 흡수되었다.
대동상정법 (大同詳定法)
대동상정법은 조선 후기에 함경도 · 강원도 · 황해도에서 실시되었던 변형된 대동법(大同法)이다. 이 지역들은 자연환경 때문에 농업 생산력의 발달이 더딘 지역으로 곡식 생산량이 불안정하고 도내에서도 농업 생산의 지역별 편차가 컸다. 이런 조건에서 경작지에 균일하고 일정한 과세액을 정하기는 어려웠다. 대동상정법은 현물납을 전세화했다는 점에서 대동법의 일환이었고, 군현별 경작지 사정에 따라 수취액을 달리했다는 점에서 대동법과는 차이를 보인다. 대동상정법도 대동법처럼 1894년 갑오개혁 후 지세제(地稅制)가 실시되면서 지세에 흡수되었다.
조선후기 대동법 실시에 따른 시행세칙을 수록한 경제서.
대동사목 (大同事目)
조선후기 대동법 실시에 따른 시행세칙을 수록한 경제서.
계방은 조선 후기에 마을 단위로 부세를 면제받는 대신 지방 관청에 일정액의 재원을 부담하는 수취 관행이다. 15세기부터 나타나던 수취 관행인 제역에서 기원하여 대동법과 균역법을 거치면서 운영상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지방 재정의 불가피한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계방 (契房)
계방은 조선 후기에 마을 단위로 부세를 면제받는 대신 지방 관청에 일정액의 재원을 부담하는 수취 관행이다. 15세기부터 나타나던 수취 관행인 제역에서 기원하여 대동법과 균역법을 거치면서 운영상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지방 재정의 불가피한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조선 후기에, 대사간, 충청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명익 (李溟翼)
조선 후기에, 대사간, 충청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강계 인삼은 조선시대 평안도 강계 지역에서 채취하여 공물로 납부하던 인삼이다. 조선시대 강계부는 인삼의 최대 생산지였다. 산림이 울창하고 고도가 높아 인삼이 자생하기 좋은 자연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강계 인삼은 일찍부터 공납제에 포함되어 조정에 납부되었다. 그런데 17세기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쌀·무명으로 대신 납부되었고 1829년에는 동전으로 상납되기 시작하였다. 강계 인삼은 내의원을 비롯한 의정부, 종친부, 충훈부 등의 중앙기관과 평안 감영·병영 등 상급기관의 약재로 사용되었다. 또한 중국과 일본 등 외국과의 무역품으로도 이용되었다.
강계 인삼 (江界 人蔘)
강계 인삼은 조선시대 평안도 강계 지역에서 채취하여 공물로 납부하던 인삼이다. 조선시대 강계부는 인삼의 최대 생산지였다. 산림이 울창하고 고도가 높아 인삼이 자생하기 좋은 자연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강계 인삼은 일찍부터 공납제에 포함되어 조정에 납부되었다. 그런데 17세기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쌀·무명으로 대신 납부되었고 1829년에는 동전으로 상납되기 시작하였다. 강계 인삼은 내의원을 비롯한 의정부, 종친부, 충훈부 등의 중앙기관과 평안 감영·병영 등 상급기관의 약재로 사용되었다. 또한 중국과 일본 등 외국과의 무역품으로도 이용되었다.
복정(卜定)은 조선시대에 중앙 각사와 지방 관아에서 과외의 공물, 역 등을 부과하던 방식이다. 비정기적으로 발생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의 과세 부담을 야기하였다. 복정의 폐단은 17세기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비용을 지원하여 주거나, 정기적인 공물로 전환하는 방법 등으로 완화되기도 하였지만 완전히 해결되지는 못하였다.
복정 (卜定)
복정(卜定)은 조선시대에 중앙 각사와 지방 관아에서 과외의 공물, 역 등을 부과하던 방식이다. 비정기적으로 발생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의 과세 부담을 야기하였다. 복정의 폐단은 17세기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비용을 지원하여 주거나, 정기적인 공물로 전환하는 방법 등으로 완화되기도 하였지만 완전히 해결되지는 못하였다.
조선후기 선혜청에서 영남대동청의 운영과 관련한 실무규정을 정리한 행정서. 관찬서.
영남청사례 (嶺南廳事例)
조선후기 선혜청에서 영남대동청의 운영과 관련한 실무규정을 정리한 행정서. 관찬서.
이하악(李河岳)은 조선 후기에 참봉, 보은현감(報恩縣監), 금천군수(金川郡守), 충주목사(忠州牧使)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비록 문과에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동법(大同法)과 양전(量田) 등 주로 경제 정책과 관련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하였다. 윤선거, 송시열 등과 친분이 있었다.
이하악 (李河岳)
이하악(李河岳)은 조선 후기에 참봉, 보은현감(報恩縣監), 금천군수(金川郡守), 충주목사(忠州牧使)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비록 문과에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동법(大同法)과 양전(量田) 등 주로 경제 정책과 관련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하였다. 윤선거, 송시열 등과 친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