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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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 세포, 유기체 차원에서 한 개체와 동일한 다른 개체를 만들어내는 제작법.
복제 (複製)
DNA, 세포, 유기체 차원에서 한 개체와 동일한 다른 개체를 만들어내는 제작법.
계운궁 복제론은 1626년(인조 4) 인조의 생모인 계운궁이 사망하자 국왕의 상복을 둘러싸고 제기된 복제 논쟁이다. 계운궁의 상례에 인조가 복제를 기년복(1년)으로 할지, 삼년복으로 할지에 대한 논란이다. 생모에 대한 상례는 삼년상이지만 인조의 경우 왕통으로는 선조와 부자 관계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결국 계운궁에 대한 복제는 기년복으로 결정되었고 상주도 인조가 아닌 능원군으로 결정되었다. 다만 상례 절차 및 상구의 사용 등은 국장에 준하여 시행되었다. 이 논의는 현종대의 예송논쟁에 앞선 복제 논쟁으로 인조의 왕위 계승의 정통성 문제와 관련이 있다.
계운궁 복제론 (啓運宮 服制論)
계운궁 복제론은 1626년(인조 4) 인조의 생모인 계운궁이 사망하자 국왕의 상복을 둘러싸고 제기된 복제 논쟁이다. 계운궁의 상례에 인조가 복제를 기년복(1년)으로 할지, 삼년복으로 할지에 대한 논란이다. 생모에 대한 상례는 삼년상이지만 인조의 경우 왕통으로는 선조와 부자 관계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결국 계운궁에 대한 복제는 기년복으로 결정되었고 상주도 인조가 아닌 능원군으로 결정되었다. 다만 상례 절차 및 상구의 사용 등은 국장에 준하여 시행되었다. 이 논의는 현종대의 예송논쟁에 앞선 복제 논쟁으로 인조의 왕위 계승의 정통성 문제와 관련이 있다.
복사기는 문서 · 도면 · 사진 따위를 같은 크기로 또는 확대, 축소하여 간단하고 빠르게 복제하는 기계이다. 복사기는 18세기 후반 습식 방식으로 시작되어 20세기 중반 건식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한국에는 1960년대 도입되었고, 초기에는 고가의 제품이었지만 점차 대중화되어 사무 환경과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80년대에는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복사기가 중요한 역할을 하며 정보 전파에 이바지하였다.
복사기 (複寫機)
복사기는 문서 · 도면 · 사진 따위를 같은 크기로 또는 확대, 축소하여 간단하고 빠르게 복제하는 기계이다. 복사기는 18세기 후반 습식 방식으로 시작되어 20세기 중반 건식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한국에는 1960년대 도입되었고, 초기에는 고가의 제품이었지만 점차 대중화되어 사무 환경과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80년대에는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복사기가 중요한 역할을 하며 정보 전파에 이바지하였다.
상례에서 스승과 동문간의 복제(服制)을 지칭하는 용어. 복제·상례.
사우복 (師友服)
상례에서 스승과 동문간의 복제(服制)을 지칭하는 용어. 복제·상례.
염국보는 고려 후기 안렴사, 지공거, 지춘추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예문관 대제학·지춘추관사 등을 거쳤다. 서성군에 봉해졌으며, 1385년(우왕 11) 지공거로서 동지공거 정몽주와 함께 과거를 주관하였다. 명나라의 3년 복제를 초상 때 입는 복제로 최초로 도입하였다. 1388년(우왕 14) 최영, 이성계에 의하여 아우 염흥방·임견미 등이 제거될 때 함께 살해되었다.
염국보 (廉國寶)
염국보는 고려 후기 안렴사, 지공거, 지춘추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예문관 대제학·지춘추관사 등을 거쳤다. 서성군에 봉해졌으며, 1385년(우왕 11) 지공거로서 동지공거 정몽주와 함께 과거를 주관하였다. 명나라의 3년 복제를 초상 때 입는 복제로 최초로 도입하였다. 1388년(우왕 14) 최영, 이성계에 의하여 아우 염흥방·임견미 등이 제거될 때 함께 살해되었다.
전라남도 나주시 안창동 소재 미천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기언』의 목판.
나주 미천서원 기언목판 (羅州 眉泉書院 記言木板)
전라남도 나주시 안창동 소재 미천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기언』의 목판.
갑인예송은 1674년(현종 15) 효종 왕비 인선왕후의 국상에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을 두고 일어난 예송 사건이다. 인선왕후가 장자의 부인인가 차자의 부인인가에 따라 자의대비는 기년복 혹은 대공복을 입어야 했는데, 이는 효종이 장자인가 차자인가 하는 효종의 종통과도 연관된 문제였다. 현종은 효종의 종통을 문란하게 만든 서인의 대공복 논리에 분노하여 복제를 기년복으로 개정하고 서인을 처벌하였다. 복제 개정 후 한 달여 만에 현종이 승하하자 14세의 나이에 즉위한 숙종은 장례 후 과감히 서인들을 조정에서 축출하고 남인을 등용하여 정국을 개편했다.
갑인예송 (甲寅禮訟)
갑인예송은 1674년(현종 15) 효종 왕비 인선왕후의 국상에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을 두고 일어난 예송 사건이다. 인선왕후가 장자의 부인인가 차자의 부인인가에 따라 자의대비는 기년복 혹은 대공복을 입어야 했는데, 이는 효종이 장자인가 차자인가 하는 효종의 종통과도 연관된 문제였다. 현종은 효종의 종통을 문란하게 만든 서인의 대공복 논리에 분노하여 복제를 기년복으로 개정하고 서인을 처벌하였다. 복제 개정 후 한 달여 만에 현종이 승하하자 14세의 나이에 즉위한 숙종은 장례 후 과감히 서인들을 조정에서 축출하고 남인을 등용하여 정국을 개편했다.
기해예송은 1659년(현종 즉위) 효종이 죽자 계모였던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의 종류를 두고 일어났던 서인과 남인의 예절에 관한 논쟁이다. 이 논쟁은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이 아닌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서인은 효종을 둘째로 인식하여 일 년을 입는 기년복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장자에 해당한다고 하여 삼년복을 주장하였다. 논의 끝에 기년복이 채택되었는데, 남인 윤선도가 서인들의 기년설을 ‘효종을 낮추고 종통과 적통을 이분화’한 것이라고 공격하였다. 이에 서인들이 윤선도를 탄핵하고 예송에 가담한 남인들을 조정에서 축출하고 정권을 독점하였다.
기해예송 (己亥禮訟)
기해예송은 1659년(현종 즉위) 효종이 죽자 계모였던 자의대비가 입을 상복의 종류를 두고 일어났던 서인과 남인의 예절에 관한 논쟁이다. 이 논쟁은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이 아닌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서인은 효종을 둘째로 인식하여 일 년을 입는 기년복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장자에 해당한다고 하여 삼년복을 주장하였다. 논의 끝에 기년복이 채택되었는데, 남인 윤선도가 서인들의 기년설을 ‘효종을 낮추고 종통과 적통을 이분화’한 것이라고 공격하였다. 이에 서인들이 윤선도를 탄핵하고 예송에 가담한 남인들을 조정에서 축출하고 정권을 독점하였다.
대전광역시 서구 괴곡동에 소재한 느티나무.
대전 괴곡동 느티나무 (大田 槐谷洞 느티나무)
대전광역시 서구 괴곡동에 소재한 느티나무.
『예복』은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복식에 관해 찬집한 저서의 초고이다. 필사본이고, 정식 출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편찬 연대는 명확하지 않지만 일본어가 일부 있어 일제강점기임을 알 수 있고, 일부 표기를 통해 1920년 이후임을 알 수 있다. 주로 출처를 제시하면서 해당 출처에 수록된 복식 제도를 전재하였고, ‘현행 예복’이라 표기하고 찬집 당시의 복식도 제시하였다. 현재 2종의 자료가 있는데, 1종은 문자로 된 내용만 있고, 1종은 문자로 된 내용 뒤에 도식이 덧붙여졌다.
예복 (禮服)
『예복』은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복식에 관해 찬집한 저서의 초고이다. 필사본이고, 정식 출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편찬 연대는 명확하지 않지만 일본어가 일부 있어 일제강점기임을 알 수 있고, 일부 표기를 통해 1920년 이후임을 알 수 있다. 주로 출처를 제시하면서 해당 출처에 수록된 복식 제도를 전재하였고, ‘현행 예복’이라 표기하고 찬집 당시의 복식도 제시하였다. 현재 2종의 자료가 있는데, 1종은 문자로 된 내용만 있고, 1종은 문자로 된 내용 뒤에 도식이 덧붙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