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서화"
검색결과 총 36건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의정원 의원, 한국독립당 정치부위원, 신한독립당 감찰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규채 (李圭彩)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의정원 의원, 한국독립당 정치부위원, 신한독립당 감찰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해방 이후 국전 심사위원, 고문, 홍익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한 화가. 한국화가.
이상범 (李象範)
해방 이후 국전 심사위원, 고문, 홍익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한 화가. 한국화가.
일제강점기 「정자관을 쓴 자화상」, 「부채를 든 자화상」, 「금강산진주담폭포」, 「탐승」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
고희동 (高羲東)
일제강점기 「정자관을 쓴 자화상」, 「부채를 든 자화상」, 「금강산진주담폭포」, 「탐승」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
안중식은 조선 후기 「산수도」, 「성재수간도」, 「도원문진도」 등을 그린 화가이다. 1881년 중국으로 떠났던 영선사 일행의 제도사로 톈진에서 1년 동안 견문을 넓히고 돌아왔다. 1902년 어진도사에 조석진과 더불어 화사로 선발되어 화명을 높였다. 이후 그의 화실인 경묵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11년 서화미술원이 설립되자 조석진·김응원 등과 같이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18년 서화협회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안중식의 화풍은 서화미술원 출신의 제자를 통해 근대 전통 화단에 영향을 미쳤다.
안중식 (安中植)
안중식은 조선 후기 「산수도」, 「성재수간도」, 「도원문진도」 등을 그린 화가이다. 1881년 중국으로 떠났던 영선사 일행의 제도사로 톈진에서 1년 동안 견문을 넓히고 돌아왔다. 1902년 어진도사에 조석진과 더불어 화사로 선발되어 화명을 높였다. 이후 그의 화실인 경묵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11년 서화미술원이 설립되자 조석진·김응원 등과 같이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18년 서화협회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안중식의 화풍은 서화미술원 출신의 제자를 통해 근대 전통 화단에 영향을 미쳤다.
일제강점기에 최초의 근대적 영업 화랑을 개설한 서화가이자 사진가이다. 평안남도 중화(中和)의 농가에서 태어나 18세 되던 1885년 중국에 건너가 8년간 수학하였다. 1896년 궁내부(宮內府) 외사과(外事課) 주사(主事)로 임명되었다. 1913년 최초의 근대적 영업 화랑인 고금서화관(古今書畵觀)을 개설하여 명가(名家)의 작품을 진열하고 판매 및 주문에 응했으며 고서화(古書畵)도 취급하였다. 서화교육 교재로 『서법진결(書法眞訣)』(1915), 『육체필론(六體筆論)』(1915), 『해강난죽보(海岡蘭竹譜)』(1916) 등을 만들기도 했다.
김규진 (金圭鎭)
일제강점기에 최초의 근대적 영업 화랑을 개설한 서화가이자 사진가이다. 평안남도 중화(中和)의 농가에서 태어나 18세 되던 1885년 중국에 건너가 8년간 수학하였다. 1896년 궁내부(宮內府) 외사과(外事課) 주사(主事)로 임명되었다. 1913년 최초의 근대적 영업 화랑인 고금서화관(古今書畵觀)을 개설하여 명가(名家)의 작품을 진열하고 판매 및 주문에 응했으며 고서화(古書畵)도 취급하였다. 서화교육 교재로 『서법진결(書法眞訣)』(1915), 『육체필론(六體筆論)』(1915), 『해강난죽보(海岡蘭竹譜)』(1916) 등을 만들기도 했다.
근대 이후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기법과 양식에 의해 그려진 그림. 한국화.
동양화 (東洋畵)
근대 이후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기법과 양식에 의해 그려진 그림. 한국화.
해방 이후 「농가도」, 「무창춘색도」, 「외금강삼선암도」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
변관식 (卞寬植)
해방 이후 「농가도」, 「무창춘색도」, 「외금강삼선암도」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
이도영은 일제강점기 「고색찬연」·「나려기완」·「석굴암 관음상」 등을 그린 서화가이자 시사만화가·삽화가·교육자이다. 1898년 전환국에 입학하여 분석학을 배웠다. 1901년 안중식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다양한 단체의 계몽운동가들과 교유하면서 시사만화, 교과서의 삽화, 신소설 삽화 등을 그렸다. 산수·인물·영모·기명절지 등 전통 회화에서도 다양한 화목의 작품을 남겼다. 이도영은 서화가로서의 지평을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미술교육과 전람회 제도를 도입하고 운영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미술가이다.
이도영 (李道榮)
이도영은 일제강점기 「고색찬연」·「나려기완」·「석굴암 관음상」 등을 그린 서화가이자 시사만화가·삽화가·교육자이다. 1898년 전환국에 입학하여 분석학을 배웠다. 1901년 안중식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다양한 단체의 계몽운동가들과 교유하면서 시사만화, 교과서의 삽화, 신소설 삽화 등을 그렸다. 산수·인물·영모·기명절지 등 전통 회화에서도 다양한 화목의 작품을 남겼다. 이도영은 서화가로서의 지평을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미술교육과 전람회 제도를 도입하고 운영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미술가이다.
먹은 동양에서 붓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되는 문방구이다. 검은색의 고형체로서, 벼루에 물을 붓고 이것으로 갈아서 먹물을 만든다. 이 먹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이미 먹이 성행하였다. 먹은 소나무나 식물유를 태워서 얻은 그을음 가루를 갖풀에 섞어 만든다. 소나무를 태워서 만든 먹이 송연묵, 식물유를 태워서 만든 것이 유연묵이다. 대개 목판 인쇄에는 송연묵을 쓰고 금속활자 인쇄와 서예에는 유연묵을 사용한다. 송연묵은 양덕 지역의 것이, 유연묵은 해주의 것이 유명했다.
먹
먹은 동양에서 붓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되는 문방구이다. 검은색의 고형체로서, 벼루에 물을 붓고 이것으로 갈아서 먹물을 만든다. 이 먹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이미 먹이 성행하였다. 먹은 소나무나 식물유를 태워서 얻은 그을음 가루를 갖풀에 섞어 만든다. 소나무를 태워서 만든 먹이 송연묵, 식물유를 태워서 만든 것이 유연묵이다. 대개 목판 인쇄에는 송연묵을 쓰고 금속활자 인쇄와 서예에는 유연묵을 사용한다. 송연묵은 양덕 지역의 것이, 유연묵은 해주의 것이 유명했다.
이종우는 일제강점기 「모부인상」, 「인형이 있는 정물」, 「독서하는 우인」 등을 그린 서양화가이다. 1918년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1923년 졸업하였다.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추억」이 양화부 3등상에 입상하면서 공식적으로 데뷔했다. 1925년 프랑스 파리에서 약 3년간 체류하면서 그린 작품 「모부인상」과 「인형이 있는 정물」이 1927년의 살롱 도톤에 출품, 입선되었다. 1934년에는 한국인 서양화가들만의 모임인 목일회를 구성하고 작품을 발표하였다. 1974년 동아일보사는 이종우의 주요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회고전을 개최하였으며, 화집도 출판하였다.
이종우 (李鍾禹)
이종우는 일제강점기 「모부인상」, 「인형이 있는 정물」, 「독서하는 우인」 등을 그린 서양화가이다. 1918년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1923년 졸업하였다.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추억」이 양화부 3등상에 입상하면서 공식적으로 데뷔했다. 1925년 프랑스 파리에서 약 3년간 체류하면서 그린 작품 「모부인상」과 「인형이 있는 정물」이 1927년의 살롱 도톤에 출품, 입선되었다. 1934년에는 한국인 서양화가들만의 모임인 목일회를 구성하고 작품을 발표하였다. 1974년 동아일보사는 이종우의 주요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회고전을 개최하였으며, 화집도 출판하였다.
일제강점기 「군어도」·「해송도」 등을 그린 화가. 한국화가.
이용우 (李用雨)
일제강점기 「군어도」·「해송도」 등을 그린 화가. 한국화가.
서화협회는 1918년 창립되어 1936년까지 존속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 단체이다. 휘호회·전람회·의촉 제작·도서인행·강습소 운영 등을 통해 회원의 활동과 후진 교육, 대중 계몽 등을 펼쳤다. 1921년 열린 제1회 서화협회전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리는 근대적인 종합 미술전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또한 1921년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 잡지인 『서화협회보』를 기관지로 발행했다. 후진 양성 기관인 ‘서화학원’을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열었다. 창립 이후 1936년까지 15회의 전시회를 통하여 한국 근대 미술의 발전과 화단의 활성화에 기여했다.
서화협회 (書畵協會)
서화협회는 1918년 창립되어 1936년까지 존속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 단체이다. 휘호회·전람회·의촉 제작·도서인행·강습소 운영 등을 통해 회원의 활동과 후진 교육, 대중 계몽 등을 펼쳤다. 1921년 열린 제1회 서화협회전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리는 근대적인 종합 미술전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또한 1921년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 잡지인 『서화협회보』를 기관지로 발행했다. 후진 양성 기관인 ‘서화학원’을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열었다. 창립 이후 1936년까지 15회의 전시회를 통하여 한국 근대 미술의 발전과 화단의 활성화에 기여했다.
광주광역시 남구 백운동 진다리(옛 지명)에서 생산되는 붓의 이름.
진다리붓
광주광역시 남구 백운동 진다리(옛 지명)에서 생산되는 붓의 이름.
골동품은 오래되고 유서 깊은 서화와 각종 기물로서 희소적·미술적 가치를 지닌 물품이다. 현재에는 고미술품이라는 용어가 많이 쓰인다. 골동품을 수집하고 완상하는 풍조는 조선 후기에 실학파 문인들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이들은 골동품을 선인들의 고아한 운치가 깃든 것으로 여기며 미적으로 감상하였다. 1905년을 전후하여 골동품이 경제적 이익 추구의 대상으로 변질되며 도굴과 위조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골동품 수집가는 전형필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민족문화유산을 수호하려는 차원에서 대규모로 골동품을 수집했다.
골동품 (骨董品)
골동품은 오래되고 유서 깊은 서화와 각종 기물로서 희소적·미술적 가치를 지닌 물품이다. 현재에는 고미술품이라는 용어가 많이 쓰인다. 골동품을 수집하고 완상하는 풍조는 조선 후기에 실학파 문인들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이들은 골동품을 선인들의 고아한 운치가 깃든 것으로 여기며 미적으로 감상하였다. 1905년을 전후하여 골동품이 경제적 이익 추구의 대상으로 변질되며 도굴과 위조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골동품 수집가는 전형필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민족문화유산을 수호하려는 차원에서 대규모로 골동품을 수집했다.
개항기 「산수도」, 「쌍마인물도」, 「설중방우도」 등을 그린 화가.
김윤보 (金允輔)
개항기 「산수도」, 「쌍마인물도」, 「설중방우도」 등을 그린 화가.
해방 이후 「설청」을 그린 화가.
박승무 (朴勝武)
해방 이후 「설청」을 그린 화가.
해방 이후 「전가풍미」를 그린 화가. 한국화가.
최우석 (崔禹錫)
해방 이후 「전가풍미」를 그린 화가. 한국화가.
1911년에 설립되었던 미술교육기관.
서화미술회 (書畵美術會)
1911년에 설립되었던 미술교육기관.
황종하는 일제강점기 황경하, 황성하, 황용하와 함께 ‘황씨 4형제전’을 개최한 서화가이다. 1922년 2회 ‘문인서화전’에서 초서가 입선하면서 서화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1922년 12월 동생들과 함께 고향 개성에 송도서화연구회를 열고 서화교육을 실시하였다. 1924년에는 연구회를 군산으로 옮기고 명칭도 서화연구소로 바꾸어 운영하였다. 형제 4명이 서화가로 활동하며 전국을 돌며 함께 전시를 열었다. 호랑이 그림을 잘 그려서 ‘황호랑이’라고 불렸고, 중국 역대 유명 화가를 사숙하여 형제 중 가장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황종하 (黃宗河)
황종하는 일제강점기 황경하, 황성하, 황용하와 함께 ‘황씨 4형제전’을 개최한 서화가이다. 1922년 2회 ‘문인서화전’에서 초서가 입선하면서 서화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1922년 12월 동생들과 함께 고향 개성에 송도서화연구회를 열고 서화교육을 실시하였다. 1924년에는 연구회를 군산으로 옮기고 명칭도 서화연구소로 바꾸어 운영하였다. 형제 4명이 서화가로 활동하며 전국을 돌며 함께 전시를 열었다. 호랑이 그림을 잘 그려서 ‘황호랑이’라고 불렸고, 중국 역대 유명 화가를 사숙하여 형제 중 가장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김유탁은 일제강점기 때, 「화조사군자」, 「조안도」 등을 그린 서화가이다. 집안 어른들에게 글씨와 그림을 배웠다. 21세 무렵 도화서 화원 양기훈에게 사군자와 화조를 배웠고 조석진 등의 화법을 익히기도 했다. 1906년에 한국 화랑의 효시되는 '수암서화관'을 설립하였다. 이후 기성서화미술회에 참여하며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고 서울 삼청동에 사설 서화학원인 서화지남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평양기생학교에서 그의 『남화초단격』을 사군자 교재로 사용하였다. 「후출사표」, 「전적벽부」, 「모란」, 「임탄은죽」 등이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다.
김유탁 (金有鐸)
김유탁은 일제강점기 때, 「화조사군자」, 「조안도」 등을 그린 서화가이다. 집안 어른들에게 글씨와 그림을 배웠다. 21세 무렵 도화서 화원 양기훈에게 사군자와 화조를 배웠고 조석진 등의 화법을 익히기도 했다. 1906년에 한국 화랑의 효시되는 '수암서화관'을 설립하였다. 이후 기성서화미술회에 참여하며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고 서울 삼청동에 사설 서화학원인 서화지남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평양기생학교에서 그의 『남화초단격』을 사군자 교재로 사용하였다. 「후출사표」, 「전적벽부」, 「모란」, 「임탄은죽」 등이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