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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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에, 함경도도사, 삼척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태 (李迨)
조선 전기에, 함경도도사, 삼척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 전기에, 공조정랑, 이조정랑, 수원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약빙 (李若氷)
조선 전기에, 공조정랑, 이조정랑, 수원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 전기에, 장단부사, 공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이홍남 (李洪男)
조선 전기에, 장단부사, 공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 전기에, 전한, 부제학, 예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자화 (李自華)
조선 전기에, 전한, 부제학, 예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광산김씨 예안파 종손가에 소장된 유학서. 종가유물.
광산김씨 예안파 종가 전적 (光山金氏 禮安派 宗家 典籍)
광산김씨 예안파 종손가에 소장된 유학서. 종가유물.
조선 전기에, 병조좌랑, 경상도경차관, 직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이약해 (李若海)
조선 전기에, 병조좌랑, 경상도경차관, 직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 후기에, 사간원헌납, 임실현감, 부평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윤문 (李允文)
조선 후기에, 사간원헌납, 임실현감, 부평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 전기에, 강원도도사, 안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민각 (李民覺)
조선 전기에, 강원도도사, 안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고려 전기에, 수사공 상서좌복야 판병부사, 위사공신 등을 역임한 무신·공신.
고의화 (高義和)
고려 전기에, 수사공 상서좌복야 판병부사, 위사공신 등을 역임한 무신·공신.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에 있는 조선전기 에 건립된 이자수 관련 건축물. 재사.
작산정사 및 가창재사 (鵲山精舍 및 可倉齋舍)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에 있는 조선전기 에 건립된 이자수 관련 건축물. 재사.
정선 수고당고택은 조선 후기에 지은 강원도 정선군에 있는 한옥이다. 조선 숙종 때 이조판서를 역임한 이자가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집으로, 안채는 1677년, 별채는 1683년에 지어졌다. 이 집은 ㄱ자형 안채와 ㄱ자형 행랑채(중문간채), 그리고 일자형 사랑채가 튼ㅁ자형의 배치를 이루며, 사랑채 앞(서쪽)에 별당인 수고당이 위치한다. 이 고택은 겹집 구성과 고미반자 등 영동과 영서 지방의 지역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양반 주택이다. 이 고택에는 국가민속문화유산인 외재 이단하 내외분의 옷이 보관되어 있다.
정선 수고당고택 (旌善 守孤堂古宅)
정선 수고당고택은 조선 후기에 지은 강원도 정선군에 있는 한옥이다. 조선 숙종 때 이조판서를 역임한 이자가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집으로, 안채는 1677년, 별채는 1683년에 지어졌다. 이 집은 ㄱ자형 안채와 ㄱ자형 행랑채(중문간채), 그리고 일자형 사랑채가 튼ㅁ자형의 배치를 이루며, 사랑채 앞(서쪽)에 별당인 수고당이 위치한다. 이 고택은 겹집 구성과 고미반자 등 영동과 영서 지방의 지역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양반 주택이다. 이 고택에는 국가민속문화유산인 외재 이단하 내외분의 옷이 보관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운량도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시빈 (李時彬)
조선 후기에, 운량도감 등을 역임한 문신.
조선 전기의 문신, 이자의 시·소·서(書)·기 등을 수록한 시문집.
음애집 (陰崖集)
조선 전기의 문신, 이자의 시·소·서(書)·기 등을 수록한 시문집.
고려 후기에, 판태상시사, 밀직상의, 첨의평리 등을 역임한 문신.
홍순 (洪淳)
고려 후기에, 판태상시사, 밀직상의, 첨의평리 등을 역임한 문신.
사숙태후는 고려 전기 제13대 왕 선종의 제2 왕비이다. 이석의 딸로서 선종이 국원공 시절에 혼인하였으며 선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선종의 아들 헌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태후로서 섭정을 하였다. 그러나 헌종 즉위 직후 이자의의 난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한 계림공 왕희가 숙종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실각하였다. 예종대에 논란 끝에 제1비 정신현비를 제치고 선종 사당에 합사하였다.
사숙태후 (思肅太后)
사숙태후는 고려 전기 제13대 왕 선종의 제2 왕비이다. 이석의 딸로서 선종이 국원공 시절에 혼인하였으며 선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선종의 아들 헌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태후로서 섭정을 하였다. 그러나 헌종 즉위 직후 이자의의 난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한 계림공 왕희가 숙종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실각하였다. 예종대에 논란 끝에 제1비 정신현비를 제치고 선종 사당에 합사하였다.
숙종은 고려 전기 제15대(재위: 1095~1105) 왕이다. 친조카인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1년 만에 왕위를 찬탈하여 즉위했다. 1097년(숙종 2) 주화를 만들어 통용시켰고, 1101년 은병을 만들었으며, 1102년 해동통보 1만 5천 관을 만들어 문·무 양반과 군인들에게 분배했다. 양주에 남경을 두어 궁궐을 지었으며, 서경에 기자사당을 만들었다. 여진정벌을 단행하였지만 실패하고, 별무반을 처음 설치하였다. 1105년 서경에 순행하여 동명왕묘에 제사하고, 병이 들어 개경으로 돌아오다가 수레 안에서 사망했다.
숙종 (肅宗)
숙종은 고려 전기 제15대(재위: 1095~1105) 왕이다. 친조카인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1년 만에 왕위를 찬탈하여 즉위했다. 1097년(숙종 2) 주화를 만들어 통용시켰고, 1101년 은병을 만들었으며, 1102년 해동통보 1만 5천 관을 만들어 문·무 양반과 군인들에게 분배했다. 양주에 남경을 두어 궁궐을 지었으며, 서경에 기자사당을 만들었다. 여진정벌을 단행하였지만 실패하고, 별무반을 처음 설치하였다. 1105년 서경에 순행하여 동명왕묘에 제사하고, 병이 들어 개경으로 돌아오다가 수레 안에서 사망했다.
소태보는 고려 전기에 서북면병마사, 참지정사, 중서시랑평장사, 문하시중, 수태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재상이다. 그는 문종 때 호부시랑에 임명되었고, 선종 때 형부상서·서북면병마사·좌복야·참지정사·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하였다. 헌종 때는 왕국모 등과 함께 이자의의 난을 진압하면서 숙종의 즉위를 도왔으며, 숙종 때는 수태위·문하시중·태사·수태부·판호부사·서경유수사·수태사 등을 지냈다. 협모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시호는 충겸이다.
소태보 (邵台輔)
소태보는 고려 전기에 서북면병마사, 참지정사, 중서시랑평장사, 문하시중, 수태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재상이다. 그는 문종 때 호부시랑에 임명되었고, 선종 때 형부상서·서북면병마사·좌복야·참지정사·중서시랑평장사 등을 역임하였다. 헌종 때는 왕국모 등과 함께 이자의의 난을 진압하면서 숙종의 즉위를 도왔으며, 숙종 때는 수태위·문하시중·태사·수태부·판호부사·서경유수사·수태사 등을 지냈다. 협모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시호는 충겸이다.
헌종은 고려 전기의 제14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094년부터 1095년까지이다. 즉위 초에는 어려서 태후가 군국대사를 청정하였다. 이자의 난 이후에 계림공 왕희, 즉 숙종에게 폐위되었다. 왕위에서 물러난지 2년 뒤에 사망하였다. 능은 개성에 위치한 온릉이다.
헌종 (獻宗)
헌종은 고려 전기의 제14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094년부터 1095년까지이다. 즉위 초에는 어려서 태후가 군국대사를 청정하였다. 이자의 난 이후에 계림공 왕희, 즉 숙종에게 폐위되었다. 왕위에서 물러난지 2년 뒤에 사망하였다. 능은 개성에 위치한 온릉이다.
보성 죽곡정사 목판(寶城 竹谷精舍 木板)은 일제강점기에 회봉 안규용의 죽곡정사 강학용으로 출판하기 위해 제작한 『주문지결』, 『동몽수지』, 『향례합편』, 『이자학칙』 등의 목판이다. 일제강점기에 안규용이 전통적인 학문과 예법을 고수하여 민족적인 자존감을 고취하고자 판각하여 죽곡정사에서 강학용으로 사용한 것으로 시대상과 함께 향촌사회 문사들의 동향, 출판 활동, 교육사 등을 연구할 수 있는 학술 자료이다.
보성 죽곡정사 목판 (寶城 竹谷精舍 木板)
보성 죽곡정사 목판(寶城 竹谷精舍 木板)은 일제강점기에 회봉 안규용의 죽곡정사 강학용으로 출판하기 위해 제작한 『주문지결』, 『동몽수지』, 『향례합편』, 『이자학칙』 등의 목판이다. 일제강점기에 안규용이 전통적인 학문과 예법을 고수하여 민족적인 자존감을 고취하고자 판각하여 죽곡정사에서 강학용으로 사용한 것으로 시대상과 함께 향촌사회 문사들의 동향, 출판 활동, 교육사 등을 연구할 수 있는 학술 자료이다.
금리현실화조치는 1965년 9월 30일에 은행의 자금중개기능 등의 개선을 위해 예금과 대출금리를 크게 인상시켜 금융 제도를 개혁하고자 취해진 조치이다. 이 조치가 취해지기 전까지는 연 20%를 상한으로 정한 이자제한법 규정에 제한되어 시중의 화폐는 은행에 집중되지 않고 사금융시장이나 실물자산에 대한 투자로 이용되었다. 이에 예금금리와 대출금리를 큰 폭으로 인상하여 금융시장의 기능을 개선하고 저축성예금을 증가시켜 은행의 자금중개기능을 제고시키고자 하였다.
금리현실화조치 (金利現實化措置)
금리현실화조치는 1965년 9월 30일에 은행의 자금중개기능 등의 개선을 위해 예금과 대출금리를 크게 인상시켜 금융 제도를 개혁하고자 취해진 조치이다. 이 조치가 취해지기 전까지는 연 20%를 상한으로 정한 이자제한법 규정에 제한되어 시중의 화폐는 은행에 집중되지 않고 사금융시장이나 실물자산에 대한 투자로 이용되었다. 이에 예금금리와 대출금리를 큰 폭으로 인상하여 금융시장의 기능을 개선하고 저축성예금을 증가시켜 은행의 자금중개기능을 제고시키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