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임진왜란"
검색결과 총 260건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출전하여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전사한 의사(義士).
명광계 (明光啓)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출전하여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전사한 의사(義士).
「동국사기」는 1881년(고종 18)에 편찬된 작자 미상의 야사류 고전소설이다. 조선 제1대 왕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건국 설화부터 제21대 왕 영조(英祖)까지의 역대 왕과 장수에 관련된 이야기를 기년체(紀年體)로 엮은 역사소설이다.
동국사기 (東國史記)
「동국사기」는 1881년(고종 18)에 편찬된 작자 미상의 야사류 고전소설이다. 조선 제1대 왕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건국 설화부터 제21대 왕 영조(英祖)까지의 역대 왕과 장수에 관련된 이야기를 기년체(紀年體)로 엮은 역사소설이다.
고흥 발포 만호성(高興 鉢浦 萬戶城)은 전라남도 고흥군에 있는 조선 전기에 축성된 수군진성이다. 발포진은 1439년(세종 21)에 수군진으로 설치되었으며, 발포진성은 1490년 축성되어 1895년 발포진이 폐영될 때까지 운영되었다. 1580년(선조 13) 이순신(李舜臣)이 충청병사해미군관(忠淸兵使海美軍官)에서 발포만호로 부임하여 18개월 동안 재임하였으며, 이곳에 거북선[龜船]이 있었다고 한다. 성곽의 둘레는 560m이며, 현재 체성의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고흥 발포 만호성 (高興 鉢浦 萬戶城)
고흥 발포 만호성(高興 鉢浦 萬戶城)은 전라남도 고흥군에 있는 조선 전기에 축성된 수군진성이다. 발포진은 1439년(세종 21)에 수군진으로 설치되었으며, 발포진성은 1490년 축성되어 1895년 발포진이 폐영될 때까지 운영되었다. 1580년(선조 13) 이순신(李舜臣)이 충청병사해미군관(忠淸兵使海美軍官)에서 발포만호로 부임하여 18개월 동안 재임하였으며, 이곳에 거북선[龜船]이 있었다고 한다. 성곽의 둘레는 560m이며, 현재 체성의 일부가 복원되어 있다.
조선시대 때,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 등이 승려 휴정에게 올린 글 등을 모아 엮은 시문집.
명장수간첩 (明將手簡帖)
조선시대 때,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 등이 승려 휴정에게 올린 글 등을 모아 엮은 시문집.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에 있는 조선전기 전라도사·의병대장 출신 난포 관련 주택.
난포고택 (蘭圃故宅)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에 있는 조선전기 전라도사·의병대장 출신 난포 관련 주택.
조선후기 학자 이만추가 임진왜란 때 평안도 중화지방에서 일본군에 항쟁한 내용을 수록한 역사서.
당산의열록 (唐山義烈錄)
조선후기 학자 이만추가 임진왜란 때 평안도 중화지방에서 일본군에 항쟁한 내용을 수록한 역사서.
동래부사 송상현을 배향하기 위해 조선후기에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에 세운 사당.
동래부사 송상현 충렬사 (東萊府使 宋象賢 忠烈祠)
동래부사 송상현을 배향하기 위해 조선후기에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에 세운 사당.
임진왜란 때 순절한 송상현의 항전 내용을 그린 조선 후기의 기록화.
동래부순절도 (東萊府殉節圖)
임진왜란 때 순절한 송상현의 항전 내용을 그린 조선 후기의 기록화.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에 있는 조선후기 충무공 이순신과 부장 김완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재실.
동린각 (東麟閣)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에 있는 조선후기 충무공 이순신과 부장 김완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재실.
임진왜란 때인 1592년 6월 5일이순신(李舜臣) 등 조선 수군이 고성(固城)의 당항리 앞바다에서 왜선을 격파한 해전.
당항포해전 (唐項浦海戰)
임진왜란 때인 1592년 6월 5일이순신(李舜臣) 등 조선 수군이 고성(固城)의 당항리 앞바다에서 왜선을 격파한 해전.
박근제는 조선 후기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으로 전라좌의병에서 활동하였다. 왕세자 사부 박광전(朴光前)의 아들이며, 학문이 뛰어나 '남주고사(南州高士)'라 칭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아버지를 따라 의병을 일으켜 전라좌의병에 종군하였다. 정유재란 당시에는 아버지 박광전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였다.
박근제 (朴根悌)
박근제는 조선 후기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으로 전라좌의병에서 활동하였다. 왕세자 사부 박광전(朴光前)의 아들이며, 학문이 뛰어나 '남주고사(南州高士)'라 칭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아버지를 따라 의병을 일으켜 전라좌의병에 종군하였다. 정유재란 당시에는 아버지 박광전의 종사관으로 출전하였다.
박근효는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으로 전라좌의병에서 활동하였다. 왕세자 사부 박광전의 아들이며,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아버지를 따라 의병을 일으켰으며, 전라좌의병에 종군하여 2차 진주성전투에 출전하였다.
박근효 (朴根孝)
박근효는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으로 전라좌의병에서 활동하였다. 왕세자 사부 박광전의 아들이며,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아버지를 따라 의병을 일으켰으며, 전라좌의병에 종군하여 2차 진주성전투에 출전하였다.
박대근은 조선 후기 선조 대 후반~인조 대 초반에 활약한 왜학 역관이다. 1591년(선조 24) 역과에 입격하였다. 이미 1590년부터 통신사행의 일원으로 참여한 것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시기에 중국 명나라 사신을 응대하는 접위관의 차비역관으로 활약하였다. 1604년, 1606년 두 차례의 강화협상기에 일본의 사정을 살피고 왔다. 1607년, 1617년, 1624년 세 차례 회답사의 당상 역관으로 활약하였다.
박대근 (朴大根)
박대근은 조선 후기 선조 대 후반~인조 대 초반에 활약한 왜학 역관이다. 1591년(선조 24) 역과에 입격하였다. 이미 1590년부터 통신사행의 일원으로 참여한 것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시기에 중국 명나라 사신을 응대하는 접위관의 차비역관으로 활약하였다. 1604년, 1606년 두 차례의 강화협상기에 일본의 사정을 살피고 왔다. 1607년, 1617년, 1624년 세 차례 회답사의 당상 역관으로 활약하였다.
박동명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에 활약했던 의병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박춘무와 조헌 등이 주도하여 일으킨 의병진에서 종군하여 청주성전투와 진천전투에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태안군수, 충청수군 우후를 역임하였다. 병자호란을 당하여 인조를 호종하려다 광주에서 전사하였다.
박동명 (朴東命)
박동명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에 활약했던 의병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박춘무와 조헌 등이 주도하여 일으킨 의병진에서 종군하여 청주성전투와 진천전투에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태안군수, 충청수군 우후를 역임하였다. 병자호란을 당하여 인조를 호종하려다 광주에서 전사하였다.
조선후기 토포사, 충청도방어사,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한 무신.
박명현 (朴名賢)
조선후기 토포사, 충청도방어사,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한 무신.
권길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상주판관(商州判官)으로 상주전투에서 싸우다 순절한 문신이다. 권근(權近)의 후손으로 음보(蔭輔)로 기용되어 상주판관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의 군사와 합세하여 상주 북천(北川)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군과 싸웠는데, 호장(戶長) 박걸(朴傑)을 비롯하여 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호응하였다. 최선을 다했지만, 무기와 군사수의 열세로 패하여 순절하였다. 뒤에 상주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권길 (權吉)
권길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상주판관(商州判官)으로 상주전투에서 싸우다 순절한 문신이다. 권근(權近)의 후손으로 음보(蔭輔)로 기용되어 상주판관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의 군사와 합세하여 상주 북천(北川)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군과 싸웠는데, 호장(戶長) 박걸(朴傑)을 비롯하여 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호응하였다. 최선을 다했지만, 무기와 군사수의 열세로 패하여 순절하였다. 뒤에 상주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김성원은 조선 전기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 참전하여 순절한 사인(士人)이자 학자이다. 어려서부터 독실한 행실이 있었고, 크고 작은 일에 관계없이 조헌에게 물어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헌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를 따라 금산전투에 참가하였다. 금산군의 서쪽 경계에서 적과 하루 종일 싸우다가 아군의 후원 세력이 없어 조헌과 함께 전사하였다. 뒷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칠백의사총(七百義士塚)에 묻혔다.
김성원 (金聲遠)
김성원은 조선 전기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 참전하여 순절한 사인(士人)이자 학자이다. 어려서부터 독실한 행실이 있었고, 크고 작은 일에 관계없이 조헌에게 물어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헌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를 따라 금산전투에 참가하였다. 금산군의 서쪽 경계에서 적과 하루 종일 싸우다가 아군의 후원 세력이 없어 조헌과 함께 전사하였다. 뒷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칠백의사총(七百義士塚)에 묻혔다.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에 있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 노응환 형제의 생가터.
공주 귀산리 만경노씨 삼의사 생가지 (公州 貴山里 萬頃盧氏 三義士 生家址)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에 있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 노응환 형제의 생가터.
남원읍성(南原邑城)은 1477년 성종의 명에 의해 축성하기 시작하여 1530년 이전에 완성되었다. 1593년 7월 임진왜란 때 파손된 남원읍성을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와 양원(楊元)이 옹성과 치성, 양마장과 해자 등을 설치하며 증축하였다. 남원읍성은 평지성으로, 4벽의 중간에 문이 개설되었으며, 지대석을 놓고 대형의 석재를 20cm 정도 들여쌓기한 조선시대의 축성법을 잘 보여주는 성이다. 이곳에서는 우리나라 성곽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양마장 시설도 발견된다.
남원읍성 (南原邑城)
남원읍성(南原邑城)은 1477년 성종의 명에 의해 축성하기 시작하여 1530년 이전에 완성되었다. 1593년 7월 임진왜란 때 파손된 남원읍성을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와 양원(楊元)이 옹성과 치성, 양마장과 해자 등을 설치하며 증축하였다. 남원읍성은 평지성으로, 4벽의 중간에 문이 개설되었으며, 지대석을 놓고 대형의 석재를 20cm 정도 들여쌓기한 조선시대의 축성법을 잘 보여주는 성이다. 이곳에서는 우리나라 성곽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양마장 시설도 발견된다.
김성일은 조선시대 통신부사,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경상우도순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1538년(중종 33)에 태어나 1593년(선조 26)에 사망했다. 1574년 사가독서했고 157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왔다. 1590년 통신부사로 일본을 다녀와서 일본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 한 보고로 인해 임진왜란 발발 후 파직되었다. 이후 복직되어 왜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다 병으로 사망했다. 이황의 수제자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주자서절요』·『자성록』·『퇴계집』 등을 편집·간행했다. 정치적으로는 유성룡·김우옹 등과 남인을 이루었다.
김성일 (金誠一)
김성일은 조선시대 통신부사,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경상우도순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1538년(중종 33)에 태어나 1593년(선조 26)에 사망했다. 1574년 사가독서했고 157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에 다녀왔다. 1590년 통신부사로 일본을 다녀와서 일본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 한 보고로 인해 임진왜란 발발 후 파직되었다. 이후 복직되어 왜군에 대한 항전을 독려하다 병으로 사망했다. 이황의 수제자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주자서절요』·『자성록』·『퇴계집』 등을 편집·간행했다. 정치적으로는 유성룡·김우옹 등과 남인을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