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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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는 조선시대 선릉과 정릉을 합한 능호를 지칭하는 용어. 능호.
선릉·정릉 (宣陵·靖陵)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는 조선시대 선릉과 정릉을 합한 능호를 지칭하는 용어. 능호.
조선후기 문신 정릉이 1613년부터 1619년까지 제수받은 교지. 종가유물.
정릉교첩 및 교지류 (鄭稜敎牒 및 敎旨類)
조선후기 문신 정릉이 1613년부터 1619년까지 제수받은 교지. 종가유물.
덕릉(德陵)은 고려 제26대 충선왕의 능이다. 1325년 충선왕의 사후 개성부 서쪽으로 12리에 안장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고 있지 않다. 다만 1377년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주의 정릉 재실을 조영할 때 덕릉의 나무를 베어 조성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현정릉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덕릉 (德陵)
덕릉(德陵)은 고려 제26대 충선왕의 능이다. 1325년 충선왕의 사후 개성부 서쪽으로 12리에 안장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고 있지 않다. 다만 1377년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주의 정릉 재실을 조영할 때 덕릉의 나무를 베어 조성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현정릉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덕수궁은 서울특별시 중구에 있는 조선시대 고종의 거처로 이용된 궁궐이다. 원래 월산대군의 사가였는데 임진왜란 후 선조가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다가 광해군 때에 경운궁으로 개칭되었다. 1897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후부터 중화전을 비롯한 전각들이 세워졌다. 건물은 정전과 침전이 있는 부분, 선원전이 있는 부분, 그리고 서양식 건물인 중명전이 있는 부분으로 나뉜다. 고종의 재위 말년 약 10년간 정치적 혼란의 주무대가 된 장소였고,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하고 이곳에 머무르게 되면서 덕수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덕수궁 (德壽宮)
덕수궁은 서울특별시 중구에 있는 조선시대 고종의 거처로 이용된 궁궐이다. 원래 월산대군의 사가였는데 임진왜란 후 선조가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다가 광해군 때에 경운궁으로 개칭되었다. 1897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후부터 중화전을 비롯한 전각들이 세워졌다. 건물은 정전과 침전이 있는 부분, 선원전이 있는 부분, 그리고 서양식 건물인 중명전이 있는 부분으로 나뉜다. 고종의 재위 말년 약 10년간 정치적 혼란의 주무대가 된 장소였고,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하고 이곳에 머무르게 되면서 덕수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려시대 진헌해 온 물품을 보관하거나 국가행사에 필요한 물품을 공판을 관장하던 임시관서.
공판도감 (供辦都監)
고려시대 진헌해 온 물품을 보관하거나 국가행사에 필요한 물품을 공판을 관장하던 임시관서.
조선전기 겸판사헌부사, 판경흥부사 동판도평의사사 등을 역임한 환관.
김사행 (金師幸)
조선전기 겸판사헌부사, 판경흥부사 동판도평의사사 등을 역임한 환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조선시대 정릉과 효릉 및 예릉을 통칭한 능호를 지칭하는 용어. 능호.
서삼릉 (西三陵)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조선시대 정릉과 효릉 및 예릉을 통칭한 능호를 지칭하는 용어. 능호.
고려 후기에, 민부상서, 대사헌, 검교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문신.
이무방 (李茂芳)
고려 후기에, 민부상서, 대사헌, 검교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문신.
유원지는 오락·레크리에이션 시설을 갖춰 이용자들이 능동적인 여가 활동을 즐길 수 있는 옥외 여가 공간이다. 이용객 확보를 위해 대체로 도시 안에 혹은 도시에서 접근하기 좋은 곳에 위치한다. 유원지는 오락뿐만 아니라 교육 등의 활동까지 고려하여 종합적으로 계획되고 있다. 타는 시설, 공연·관람 시설, 운동·휴양 시설, 편익 시설 등을 조화롭게 구성하여야 한다. 최근에는 놀이공원, 놀이동산, 테마파크 등이 기존의 자연휴양지를 대체하고 있다. 유원지는 연령이나 계층에 구애됨 없이 일상의 피로감 등을 해소할 수 있는 여가 공간이다.
유원지 (遊園地)
유원지는 오락·레크리에이션 시설을 갖춰 이용자들이 능동적인 여가 활동을 즐길 수 있는 옥외 여가 공간이다. 이용객 확보를 위해 대체로 도시 안에 혹은 도시에서 접근하기 좋은 곳에 위치한다. 유원지는 오락뿐만 아니라 교육 등의 활동까지 고려하여 종합적으로 계획되고 있다. 타는 시설, 공연·관람 시설, 운동·휴양 시설, 편익 시설 등을 조화롭게 구성하여야 한다. 최근에는 놀이공원, 놀이동산, 테마파크 등이 기존의 자연휴양지를 대체하고 있다. 유원지는 연령이나 계층에 구애됨 없이 일상의 피로감 등을 해소할 수 있는 여가 공간이다.
조선 중기에, 전적, 병조좌랑, 정언 등을 역임한 문신.
오익 (吳翊)
조선 중기에, 전적, 병조좌랑, 정언 등을 역임한 문신.
『신라국기(新羅國記)』는 당나라의 고음이 책봉사 귀숭경의 종사관으로 신라에 와서 보고 들은 것을 수록한 견문록이다.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신라국기』의 기록 가운데 일부를 당나라의 영호징(令狐澄)이 『정릉유사(貞陵遺事)』에 실었고, 『신라국기』 기록이 포함된 『정릉유사』의 일문(逸文)이 『감주집(紺珠集)』과 『설부(説郛)』에 소개되었다. 『신라국기』에는 골품제와 화랑제, 망덕사(望德寺) 관련 내용이 기술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
신라국기 (新羅國記)
『신라국기(新羅國記)』는 당나라의 고음이 책봉사 귀숭경의 종사관으로 신라에 와서 보고 들은 것을 수록한 견문록이다.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신라국기』의 기록 가운데 일부를 당나라의 영호징(令狐澄)이 『정릉유사(貞陵遺事)』에 실었고, 『신라국기』 기록이 포함된 『정릉유사』의 일문(逸文)이 『감주집(紺珠集)』과 『설부(説郛)』에 소개되었다. 『신라국기』에는 골품제와 화랑제, 망덕사(望德寺) 관련 내용이 기술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
조선 전기에, 호조좌랑, 형조좌랑, 공조좌랑 등을 역임한 문신.
송대립 (宋大立)
조선 전기에, 호조좌랑, 형조좌랑, 공조좌랑 등을 역임한 문신.
화릉(和陵)은 조선 제1대 국왕 태조의 어머니인 의혜왕후 영흥최씨의 능이다. 환조 정릉과 상하 동원이영으로 정릉이 위쪽, 화릉이 아래쪽에 있다. 화릉은 정릉과 상하로 배치되어 고려 말 사대부묘와 조선 전기 추존왕릉의 제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현재 북한 함경남도 함주군에 자리한다.
화릉 (和陵)
화릉(和陵)은 조선 제1대 국왕 태조의 어머니인 의혜왕후 영흥최씨의 능이다. 환조 정릉과 상하 동원이영으로 정릉이 위쪽, 화릉이 아래쪽에 있다. 화릉은 정릉과 상하로 배치되어 고려 말 사대부묘와 조선 전기 추존왕릉의 제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현재 북한 함경남도 함주군에 자리한다.
흥천사(興天寺)는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있는 조선 태조의 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된 사찰이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직할 교구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이다. 조선 전기에 폐사되었다가 1669년(현종 10), 정릉(貞陵)을 새로 꾸미면서 능 밖으로 절을 이건하고 신흥사라 이름하였다. 1865년(고종 2)에 다시 흥천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삼각산 흥천사 (三角山 興天寺)
흥천사(興天寺)는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있는 조선 태조의 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된 사찰이다. 현재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직할 교구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이다. 조선 전기에 폐사되었다가 1669년(현종 10), 정릉(貞陵)을 새로 꾸미면서 능 밖으로 절을 이건하고 신흥사라 이름하였다. 1865년(고종 2)에 다시 흥천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희릉(禧陵)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조선 제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무덤이다.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안에 자리하며 효릉과 예릉을 통합하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암반에 능침을 조성하였다는 이유로 1537년에 헌릉의 서쪽 언덕에서 천릉하여 고양시에 자리 잡았다. 1973년에 초장지가 발굴되어 16세기 초 회격릉의 구조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주었다.
희릉 (禧陵)
희릉(禧陵)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조선 제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무덤이다.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안에 자리하며 효릉과 예릉을 통합하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암반에 능침을 조성하였다는 이유로 1537년에 헌릉의 서쪽 언덕에서 천릉하여 고양시에 자리 잡았다. 1973년에 초장지가 발굴되어 16세기 초 회격릉의 구조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