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5년 3월 2일에 장경왕후(章敬王后, 14911515)가 원자를 낳고 산후병으로 승하하였다. 총호사(總護使)는 정광필이며, 산릉도감 제조로는 안윤덕 · 유담년 · 남곤을 임명하였다. 산릉 후보지로 경릉(敬陵) 국내가 왕후의 능으로 합당하며 공역이 편리한 반면, 헌릉(獻陵) 국내 후보지는 산세가 장대하여 한강을 건너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하였으나, 중종(中宗, 14881544, 재위 1506~1544)은 쌍릉을 조성하기에 적합한 곳을 택하여 헌릉으로 결정하였다.
장마를 피하여 급히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3월 29일에 현궁(玄宮)을 만들기 위하여 구덩이를 5자쯤 파내니 암반이 나왔다. 다시 터를 알아볼 여유가 없어 약간 아래쪽을 파 보고 돌이 나왔지만 제거할 수 있다고 하여 그 자리에 산릉을 조성하였다. 약 2개월만에 급히 진행된 공역이 마무리되고, 윤4월 2일에 발인하여 4일에 국장 의례를 갖추어 안장하였다.
12년쯤 지난 1537년에 희릉(禧陵)의 능침에 돌이 있다는 논란이 일어나, 산릉을 담당하였던 신료들에게 죄를 묻고 천릉을 진행하였다. 새로 산릉을 옮길 후보지는 초장지에서 약 2~3리 떨어진 옹암의 언덕과 희릉의 남산 화소(火巢) 밖에 있는 취적동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중종은 민폐를 줄이기 위하여 고양군(지금의 고양 서삼릉)으로 결정하였다. 8월 26일에 옛 능에서 발인하여 9월 6일에 고양군의 새 능으로 옮겨졌다. 세종의 영릉(英陵)을 여주로 천릉할 때처럼 옛 희릉에 조성된 석물(石物)은 모두 땅에 묻었다.
희릉은 천릉하여 초장지가 남아 있었는데, 1973년에 세종대왕 초장지로 인식되어 발굴이 시작되었다. 2007~2008년에 현궁까지 발굴이 진행되어 회격(灰隔)이 드러나면서 장경왕후의 초장지로 밝혀졌다.
1515년에 헌릉의 서편에 조성된 희릉의 현궁은 회격으로 조성되고 그 외곽에 숯을 다져 쌓은 탄격이 남아 있었다. 『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가 남아 있는 17세기 이후의 회격과는 차이가 있으며, 16세기 초의 회격으로 조성된 현궁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주는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