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양(光陽)이고, 자는 석지(釋之)이다. 찬성사에 증직된 이인영(李仁英)의 아들이다.
충목왕 때 급제하여 전교교감(典校校勘)에 오르고, 공민왕 초년에 외직으로 나가 순창군(淳昌郡)을 다스렸다. 이 때 고관 중에 사사로이 토산물을 청구하는 자가 있었지만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 뒤 헌납(獻納)이 되었으나 당대의 권신 김용(金鏞)에게 접근하지 않아 미움을 받았다.
당시의 제도에 봉릉(封陵)을 할 때에는 반드시 집의를 시켜 서명하게 했는데, 서명한 사람은 크게 출세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모두 이를 회피하였다. 그러나 장령(掌令)으로 정릉(正陵: 魯國公主의 능)을 봉하게 되었을 때, 집의 홍원철(洪原哲)이 서명을 꺼리므로 대신 서명해 왕의 신임을 받았다.
그로 인하여 어머니의 상중에도 불구하고 기복(起復: 喪中에는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으나 국가의 필요에 의해 상제의 몸으로 벼슬자리에 나오게 하는 일)해 1368년(공민 17)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므로 이를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그 뒤 민부상서(民部尙書)·대사헌을 거쳐 추충좌명공신(推忠佐命功臣)의 호를 받았고, 이어 밀직학사(密直學士)로 승진하였다.
1372년(공민왕 21) 4월 가뭄으로 강안전(康安殿)에서 비를 빌었으며, 같은 해 계림부윤이 되어 풍년이 들자, 백성들에게 어염(魚鹽)을 팔아 의창(義倉)을 설치해 진대(賑貸)를 준비하였다. 그 공적이 순찰사 최영(崔瑩)에게 인정되어 판개성부사로 승진하였고, 여절공신(礪節功臣)이라는 호가 더해졌다. 1374년 4월 정당문학으로 지공거(知貢擧)를 맡았다.
1375년(우왕 1) 정월 서연(書筵)을 열었을 때 사부(師傅)가 되고, 1376년(우왕 2) 시중 경복흥(慶復興)과의 알력으로 파직되어 광양군(光陽君)에 봉해졌다. 1379년 문하평리(門下評理)로 명나라에 가서 공물을 바치고, 진정표(陳情表)를 올려 공민왕의 시호와 우왕의 작명(爵命)을 청했으나 명나라의 거부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창왕이 즉위한 뒤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올랐고, 공양왕 때는 추충여절찬화공신(推忠礪節贊化功臣)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문인(門人) 조준(趙浚)의 천거로 검교문하시중이 되어 1394년(태조 3) 2월 판삼사사 정도전 등과 함께 동국(東國)의 역대 여러 현신(賢臣)들의 비록(秘錄)을 두루 상고하여 요점을 추린 바 있으며, 1396년 정월 광양부원군(光陽府院君)에 봉해졌고, 1398년(태조 7) 8월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