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14년(1365) 2월 왕후인 노국대장공주가 난산 끝에 죽자, 공민왕은 왕후의 상장례에 국력을 총동원하기 위해 4도감 13색을 본격적으로 설치 · 운영하였다. 4도감 중 국장도감, 빈전도감, 조묘도감, 재도감 중 정릉의 조성은 조묘도감이 주관하였다.
13색은 산소영반색, 법위의색, 상유색, 유거색, 제기색, 상복색, 반혼색, 복완색, 소조색, 관곽색, 묘실색, 포진색, 진영색이다. 이 중 산소영반색은 왕릉에서 이루어지는 불교 법회와 관련하였고, 법위의색과 상유색 및 유거색은 상여를 만들고 꾸몄으며, 묘실색에서는 무덤 내부의 묘실을, 관곽색은 시신을 담을 관곽을, 복완색은 상복을, 제기색은 제기류를, 진영색은 노국대장공주의 진영을 그렸다.
1366년(공민왕 15) 왕후의 혼전인 인희전(仁熙殿)에 자주 방문하여 많은 행사를 거행하였고, 환관 김사행(金師幸)에게 4도감 13색의 지휘 감독을 맡겨 자신의 수릉인 현릉은 정릉의 서쪽에 쌍릉 형식으로 조영토록 하였다. 1372년(공민왕 21) 정릉과 함께 공민왕의 수릉인 현릉까지 쌍릉 형식으로 조성하고 문무석인상을 비롯한 능묘 석물을 화려하게 장식하여 완공하였다.
이듬해 1373년(공민왕 22) 왕륜사(王輪寺)의 동남쪽에 왕후의 영전(影殿)을 건립하였으며, 1374년(공민왕 23) 9월 공민왕의 사후 정릉의 서쪽 현릉에 묻혔다. 노국대장공주의 신주는 1376년(우왕 2) 11월 기해일에 공민왕의 신주를 태묘에 모실 때 함께 부묘되어 제사를 지냈다.
공민왕은 1370년(공민왕 19)에 수릉호(守陵戶)를 두고 원찰로 운암사(후일 창화사, 광암사, 보제사로 개칭함)를 지정하여 불사를 크게 일으키고 정릉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정릉은 공민왕의 현릉과 함께 잘 관리되어 『 조선왕조실록』이나 『여지승람』 및 『 여조왕릉등록』 등에 기록되어 있다.
1905년 이후 1920년까지 일본은 13회에 걸쳐 도굴하였고, 당시 정릉(正陵)의 명문이 새겨진 상감청자가 도굴되어 알려지기도 하였다. 이후 땜질 정도로 수리가 되어 수십 년간 방치하여 황폐화되었다가, 광복 후 1956년에 이르러 북한 당국에서 비로소 보수를 하였다. 이때 현정릉의 현실 내부를 조사하면서 벽화를 모사하여, 현재 개성특별시에 있는 고려박물관에 진열하고 있다.
노국대장공주의 정릉은 공민왕의 현릉과 함께 현재 개성특별시 서쪽 교외 봉명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무선봉의 나지막한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능역은 동서 폭이 약 50m, 남북 길이가 45m 범위의 장방형의 능 3계와 이어지는 경사면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 경사면 중앙에 계단을 두어서 능에 오르내리도록 하고 있으며, 중앙 계단의 좌우에도 석축을 쌓았다. 그 경사면 아래 평지에 정자각이 서고, 정자각 서북쪽 축대 아래 앙복련으로 장식된 대석을 가진 사각의 소전대를 두었다.
능역 상단에는 동북서 방향에 3m 높이의 곡담을 ㄷ 자 모양으로 두르고 현정릉 두 봉분을 가까이 붙여서 나란히 배치하여 쌍릉을 이루고 있다. 봉토의 높이는 약 650㎝이며, 지름은 137㎝이다. 봉분 아래쪽을 지대석, 우석, 면석, 만석, 인석으로 이루어진 12각의 병풍석을 두르고 있다.
난간석은 병풍석 밖으로 평행하여 돌리고 있는데 두 능이 가까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각기 겹치는 부분의 난간을 생략하고 각각 10각씩 연결하고 있다. 석난간 밖으로 각각 석호 4기, 석양 4기를 교대로 배치하고 있다. 능 앞에 상석을 하나씩 배치하고 그 아래 5개의 북 모양의 받침돌로 받쳐 넣고 있으며, 고석 사방에 귀면상의 나어두를 새기고 있다.
제1층단 동서 양쪽에는 망주석을 마주 세웠는데 팔각의 이중 기단 위에 세운 팔각 석주와 그 위의 주두부로 이루어져 있다. 팔각 석주의 중상부에는 구멍 뚫은 귀가 달려 있다. 두 능의 정면에는 각각 소맷돌이 달린 계단을 만들고, 그 양쪽에 작은 계단이 있어 오르내리게 하고 있다.
제2층단에는 각 능의 정면에 장명등을 하나씩 두었다. 장명등은 하대석과 상대 받침을 앙복련으로 장식하고, 중대석은 사면에 안상을 새겼으며 그 가운데에 3보주를 새기고 있다. 중심이 되는 구슬에는 태극이 새겨져 있다. 장명등 좌우에는 문석인 2쌍을 세웠는데, 복두에 공복을 입은 입상이다.
제3층단은 제2층단보다 140㎝ 낮게 되었고 중앙에 한 개, 양쪽에 두 개의 계단을 두어 제2층단과 연결하고 있다. 제3층단에는 양쪽에 무석인 2쌍이 서 있는데 갑옷에 투구를 쓰고 검을 차고 있다. 위쪽의 무석인은 가슴에 손을 모으고 다른 하나는 검을 짚고 선 형상이다.
고려왕릉 중 확실하게 문석인과 차별하여 무석인을 세운 예는 거의 없으며, 현정릉에 와서 비로소 갑옷으로 무장한 무석인을 세움으로써 이후 조선 왕릉의 문무석을 갖추는 제도의 모본이 되고 있다. 문석인과 무석인의 크기는 키가 각각 330㎝이다. 하계에는 가운데와 양옆의 돌계단이 있으며 여기에서 정자각과의 높이 차이는 10m이다. 맨 아래 석축에서 223m 떨어져서 서쪽에 운암사지가 있다.
노국대장공주의 정릉은 공민왕의 수릉인 현릉과 함께 4도감 13색을 설치하고 환관 김사행의 지휘 감독을 받아 조영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왕릉 중 능제가 완비되고 보존 상태가 좋으며, 석인상과 석수상을 비롯한 각종 능묘 석물의 조각적 수준도 매우 우수하다. 왕릉인 현릉과 왕후릉인 정릉이 쌍릉을 이룬 형식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최초의 능묘 형식이다.
이후 조선 전기 제2대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이나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 등 왕후가 먼저 죽고 국왕이 수릉으로서 자신의 왕릉을 조영할 때 왕릉과 왕후릉을 쌍릉 형식으로 조영하는 데 양식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정릉은 봉분 주위에 석호상과 석양상을 배치하고, 능묘 앞에 혼유석, 장명등 및 망주석, 문석인상과 무석인상 및 정자각을 배치하는 등 능묘 석물의 제도를 완비하여 1406년 조선 제1대 태조비 신의왕후의 제릉을 비롯한 조선왕후릉의 전형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