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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은 일제강점기 아우내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2년에 태어나 1920년에 사망했다.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1916년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편입했다.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전국적으로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서울 소식을 전한 후 4월 1일 병천시장에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검거되어 투옥 중에도 옥중만세운동을 벌였고,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유관순 (柳寬順)
유관순은 일제강점기 아우내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2년에 태어나 1920년에 사망했다.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1916년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편입했다.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전국적으로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서울 소식을 전한 후 4월 1일 병천시장에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검거되어 투옥 중에도 옥중만세운동을 벌였고,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1947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서 경찰이 발포하여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이후 남로당이 주도한 총파업, 경찰·서북청년단의 검속·탄압, 남로당의 무장봉기, 계엄령선포 및 중산간 지역 초토화, 6·25전쟁으로 인한 예비검속 및 즉결처분 등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이 다수 희생되었다. 사건은 1954년에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막을 내렸다.
제주4·3사건 (濟州四三事件)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1947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에서 경찰이 발포하여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이후 남로당이 주도한 총파업, 경찰·서북청년단의 검속·탄압, 남로당의 무장봉기, 계엄령선포 및 중산간 지역 초토화, 6·25전쟁으로 인한 예비검속 및 즉결처분 등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이 다수 희생되었다. 사건은 1954년에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되면서 막을 내렸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한국 관련 결정 사항을 신탁통치로 규정하여 일어난 우익 세력의 반대운동.
신탁통치 반대운동 (信託統治 反對運動)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한국 관련 결정 사항을 신탁통치로 규정하여 일어난 우익 세력의 반대운동.
1948년 10월, 여수 주둔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4ㆍ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
여수·순천 10·19사건 (麗水·順天 10·19事件)
1948년 10월, 여수 주둔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4ㆍ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
안재홍은 해방 이후 민정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사학자이다. 1891년(고종 28)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중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신간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 임시정부 활동 등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결별하고 국민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했고 과도입법의원, 미군정청 민정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납북되었다.
안재홍 (安在鴻)
안재홍은 해방 이후 민정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사학자이다. 1891년(고종 28)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중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신간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 임시정부 활동 등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결별하고 국민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했고 과도입법의원, 미군정청 민정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납북되었다.
근로자가 주체가 되어 근로조건의 유지·개선 및 기타 근로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 노조.
노동조합 (勞動組合)
근로자가 주체가 되어 근로조건의 유지·개선 및 기타 근로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 노조.
벽돌무덤은 벽돌을 이용하여 일정한 양식으로 축조한 무덤양식이다. 벽돌을 재료로 하여 축조된 무덤으로 전축분이라고 부른다. 덧널무덤[木槨墓] 축조로 산림자원이 감소하여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반도의 벽돌무덤은 낙랑과 백제에서만 발견되는데 낙랑은 중국 한나라의 양식이고 백제는 남조 양나라의 양식을 모방하였다. 낙랑의 벽돌무덤은 고구려 돌방무덤이 확산되면서 점차 소멸하였다. 백제의 벽돌무덤은 부여로 천도한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터널형의 널방 형식은 부여고분군 및 대가야세력권의 함안·고령 지역 고분군에 이어졌다.
벽돌무덤 (甓돌무덤)
벽돌무덤은 벽돌을 이용하여 일정한 양식으로 축조한 무덤양식이다. 벽돌을 재료로 하여 축조된 무덤으로 전축분이라고 부른다. 덧널무덤[木槨墓] 축조로 산림자원이 감소하여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반도의 벽돌무덤은 낙랑과 백제에서만 발견되는데 낙랑은 중국 한나라의 양식이고 백제는 남조 양나라의 양식을 모방하였다. 낙랑의 벽돌무덤은 고구려 돌방무덤이 확산되면서 점차 소멸하였다. 백제의 벽돌무덤은 부여로 천도한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터널형의 널방 형식은 부여고분군 및 대가야세력권의 함안·고령 지역 고분군에 이어졌다.
네비어스 선교정책은 선교사 네비어스가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위하여 창안한 선교 방법론이다. 네비어스는 1854년부터 1893년까지 중국에서 40년간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네비어스는 선교 경험을 정리하여 1885년에 「선교사의 토착교회 설립 및 육성방안」을 발표하였다. 네비어스 선교 정책은 자전(自傳), 자립, 자치로 요약할 수 있다. 자전은 토착인이 토착인에게 전도하도록 하는 것이다. 자립은 토착 교인이 토착 교회 목회자의 생활비와 교회 운영을 책임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토착 교회 문제를 토착 교인들이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자치이다.
네비어스 선교정책 (Nevius 宣敎政策)
네비어스 선교정책은 선교사 네비어스가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위하여 창안한 선교 방법론이다. 네비어스는 1854년부터 1893년까지 중국에서 40년간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네비어스는 선교 경험을 정리하여 1885년에 「선교사의 토착교회 설립 및 육성방안」을 발표하였다. 네비어스 선교 정책은 자전(自傳), 자립, 자치로 요약할 수 있다. 자전은 토착인이 토착인에게 전도하도록 하는 것이다. 자립은 토착 교인이 토착 교회 목회자의 생활비와 교회 운영을 책임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토착 교회 문제를 토착 교인들이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자치이다.
조봉암은 해방 이후 농림부장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9년 경기도 강화 출생으로 강화에서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1년간 투옥되었다. 일본 유학 시절 사회주의·무정부주의 계열의 흑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참여 등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였고,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된 후 7월 사형이 집행되었으나 2011년 대법원의 무죄판결로 복권되었다.
조봉암 (曺奉岩)
조봉암은 해방 이후 농림부장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9년 경기도 강화 출생으로 강화에서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1년간 투옥되었다. 일본 유학 시절 사회주의·무정부주의 계열의 흑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참여 등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후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였고,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된 후 7월 사형이 집행되었으나 2011년 대법원의 무죄판결로 복권되었다.
중광단(重光團)은 1911년 3월 북간도에서 대종교단(大倧敎團)에 의해 설립된 무장단체이다. 초기에는 민족학교를 설립해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1917년부터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북간도의 3 · 1운동을 주도하였으며, 1919년 5월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중광단 (重光團)
중광단(重光團)은 1911년 3월 북간도에서 대종교단(大倧敎團)에 의해 설립된 무장단체이다. 초기에는 민족학교를 설립해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1917년부터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북간도의 3 · 1운동을 주도하였으며, 1919년 5월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점자는 손가락으로 읽도록 만든 시각장애인용 문자이다. 점자는 6점으로 구성되고, 왼쪽 위에서 아래로 1, 2, 3점, 오른쪽 위에서 아래로 4, 5, 6점의 고유 번호를 붙여 사용한다. 1824년에 파리맹학교의 루이 브라유가 6점 점자를 이용하여 알파벳, 숫자, 간단한 문장부호 등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1898년에 감리교 선교사 홀 여사가 뉴욕점자를 기초로 한글점자를 만들어 맹여학생들에게 처음 가르쳤다. 제생원 맹아부의 교사 박두성과 제자들이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 조직하여 1926년 11월 4일 훈맹정음을 창안하여 발표하였다.
점자 (點字)
점자는 손가락으로 읽도록 만든 시각장애인용 문자이다. 점자는 6점으로 구성되고, 왼쪽 위에서 아래로 1, 2, 3점, 오른쪽 위에서 아래로 4, 5, 6점의 고유 번호를 붙여 사용한다. 1824년에 파리맹학교의 루이 브라유가 6점 점자를 이용하여 알파벳, 숫자, 간단한 문장부호 등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1898년에 감리교 선교사 홀 여사가 뉴욕점자를 기초로 한글점자를 만들어 맹여학생들에게 처음 가르쳤다. 제생원 맹아부의 교사 박두성과 제자들이 ‘조선어점자연구위원회’를 조직하여 1926년 11월 4일 훈맹정음을 창안하여 발표하였다.
황구첨정은 조선 후기, 군정(軍政)의 폐단 중 하나로, 갓난아기까지 군적에 올려 세금을 부과하던 행위이다. 군역 기피 현상으로 심해져 군포(軍布) 납부자는 줄어드는데 군현별로 배정된 군정의 총액은 그대로인 상황에서 지방관이 인원을 채우기 위하여 행한 불법 행위의 한 사례이다.
황구첨정 (黃口簽丁)
황구첨정은 조선 후기, 군정(軍政)의 폐단 중 하나로, 갓난아기까지 군적에 올려 세금을 부과하던 행위이다. 군역 기피 현상으로 심해져 군포(軍布) 납부자는 줄어드는데 군현별로 배정된 군정의 총액은 그대로인 상황에서 지방관이 인원을 채우기 위하여 행한 불법 행위의 한 사례이다.
미천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15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300~331년이다. 서천왕의 손자로 아버지가 봉상왕에 의해 반역혐의로 죽임을 당하자 피신해 소금장수를 하며 살다가 봉상왕 폐위 후 국상 창조리 등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다. 재위 중에 중국 진나라가 와해되는 국제적 격동기를 맞아 대외팽창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낙랑군과 대방군을 병합했고 현도성을 공격하는 등 남방으로 급속한 팽창을 도모했다. 선비족 일파인 모용부와 요동지방을 두고 오랫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다. 재위 32년 만에 죽자 미천지원에 장사 지냈다.
미천왕 (美川王)
미천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15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300~331년이다. 서천왕의 손자로 아버지가 봉상왕에 의해 반역혐의로 죽임을 당하자 피신해 소금장수를 하며 살다가 봉상왕 폐위 후 국상 창조리 등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다. 재위 중에 중국 진나라가 와해되는 국제적 격동기를 맞아 대외팽창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낙랑군과 대방군을 병합했고 현도성을 공격하는 등 남방으로 급속한 팽창을 도모했다. 선비족 일파인 모용부와 요동지방을 두고 오랫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다. 재위 32년 만에 죽자 미천지원에 장사 지냈다.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의 랴오닝[遼寧]·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 등 동북3성과 그 밖의 중국 땅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는 한민족 혈통을 지닌 중국 국적의 주민.
조선족 (朝鮮族)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의 랴오닝[遼寧]·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 등 동북3성과 그 밖의 중국 땅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는 한민족 혈통을 지닌 중국 국적의 주민.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제일의 중심 가람이었던 황룡사의 사찰터.
경주 황룡사지 (慶州 皇龍寺址)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제일의 중심 가람이었던 황룡사의 사찰터.
공전은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에 국가나 왕실의 소유지이거나 수조지(收租地)였던 토지이다. 고려시대에 공전의 종류는 내장전(內莊田), 장처전(莊處田), 공해전(公廨田), 둔전(屯田), 학전(學田), 적전(籍田) 등이 있었는데, 1과 · 2과 · 3과 공전으로 나누어졌다. 1과 공전은 국가나 왕실 소유지, 2과 공전은 공공기관 소속의 공해전, 3과 공전은 일반 민전(民田)을 가리킨다. 고려 말 사전혁파를 실행에 옮겨 탄생한 조선왕조에서는 과전법(科田法)을 제정하여 외방(外方)의 사전을 공전화(公田化)하여 국가 수조지로 만들었다.
공전 (公田)
공전은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에 국가나 왕실의 소유지이거나 수조지(收租地)였던 토지이다. 고려시대에 공전의 종류는 내장전(內莊田), 장처전(莊處田), 공해전(公廨田), 둔전(屯田), 학전(學田), 적전(籍田) 등이 있었는데, 1과 · 2과 · 3과 공전으로 나누어졌다. 1과 공전은 국가나 왕실 소유지, 2과 공전은 공공기관 소속의 공해전, 3과 공전은 일반 민전(民田)을 가리킨다. 고려 말 사전혁파를 실행에 옮겨 탄생한 조선왕조에서는 과전법(科田法)을 제정하여 외방(外方)의 사전을 공전화(公田化)하여 국가 수조지로 만들었다.
4바라밀·6바라밀·10바라밀 등 피안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보살이 닦아야 한다는 불교수행법.
바라밀 (波羅蜜)
4바라밀·6바라밀·10바라밀 등 피안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보살이 닦아야 한다는 불교수행법.
이기붕은 해방 이후 서울시장, 국방부장관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6년 서울 출생으로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1923년 데이버대학 문과를 졸업한 후 1934년 귀국해 광산 산업을 했다. 해방 후 이승만의 비서를 지냈고, 서울특별시 시장, 국방부 장관 등을 지냈다. 이승만의 지시로 자유당을 창당하였고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하여 사사오입을 강행하였다. 1960년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4·19혁명으로 사임하였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 후 피신해 있다가 4월 28일 전가족이 자살하였다.
이기붕 (李起鵬)
이기붕은 해방 이후 서울시장, 국방부장관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6년 서울 출생으로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1923년 데이버대학 문과를 졸업한 후 1934년 귀국해 광산 산업을 했다. 해방 후 이승만의 비서를 지냈고, 서울특별시 시장, 국방부 장관 등을 지냈다. 이승만의 지시로 자유당을 창당하였고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하여 사사오입을 강행하였다. 1960년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4·19혁명으로 사임하였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 후 피신해 있다가 4월 28일 전가족이 자살하였다.
해방 이후 국무총리, 부통령 등을 역임한 정치인.
장면 (張勉)
해방 이후 국무총리, 부통령 등을 역임한 정치인.
안견파는 산수화의 대가 안견과 그의 화풍을 추종했던 화가들을 가리키는 미술유파이다. 안견파의 산수화 작품들은 구도와 구성 등에서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각 폭의 그림은 한쪽에 무게가 쏠려 있고 반대쪽은 가볍게 묘사되는 편파구도를 이룬다. 또 각 폭은 몇 무더기의 경관들로 짜여져 있으며 시각적 연결성을 드러내는 구성을 보인다. 안견파화풍은 석경·양팽손·김시·이정근 등 무수한 화가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조선 초기의 기록화와 소상팔경도 등의 감상화가 대부분 안견파화풍으로 그려졌다. 일본에도 전해져 동아시아의 회화 발전에 기여했다.
안견파 (安堅派)
안견파는 산수화의 대가 안견과 그의 화풍을 추종했던 화가들을 가리키는 미술유파이다. 안견파의 산수화 작품들은 구도와 구성 등에서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각 폭의 그림은 한쪽에 무게가 쏠려 있고 반대쪽은 가볍게 묘사되는 편파구도를 이룬다. 또 각 폭은 몇 무더기의 경관들로 짜여져 있으며 시각적 연결성을 드러내는 구성을 보인다. 안견파화풍은 석경·양팽손·김시·이정근 등 무수한 화가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조선 초기의 기록화와 소상팔경도 등의 감상화가 대부분 안견파화풍으로 그려졌다. 일본에도 전해져 동아시아의 회화 발전에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