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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사건(椵島事件)

조선시대사사건

 1623년(인조 1) 명나라 군대가 조선의 가도에 주둔하여 조선과 명나라 및 후금 사이에서 빚어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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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1623년(인조 1) 명나라 군대가 조선의 가도에 주둔하여 조선과 명나라 및 후금 사이에서 빚어진 사건.
영역닫기영역열기역사적 배경
1616년(광해군 8)에 건국한 후금은 그 세력이 점차 강성해져 1619년에 명나라의 요동지방을 공략하기에 이르렀다.
대륙에서 왕조 교체의 정세를 간파한 광해군은 평안도관찰사에 박엽(朴燁), 만포첨사에 정충신(鄭忠臣)을 임명하는 등 국경 방비를 강화하는 한편, 명나라가 후금을 치기 위하여 원병을 요청하자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여 명의 군사를 주어 출병하게 하였다.
그러나 형세를 관망하여 향배를 정하도록 밀령을 내림에 따라 강홍립은 샤르후[富車] 싸움에서 후금에 투항하였다. 즉, 광해군은 명나라의 원병 요청을 들어주면서도 후금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려는 양면외교 정책을 폈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1621년후금이 요양(療養)을 공격하자 명나라의 요동도사(遼東都司) 모문룡(毛文龍)이 이에 쫓겨 국경을 넘어와 철산(鐵山)과 선천(宣川) 사이에 주둔하였다. 이에 그 해 12월에 후금군이 강을 건너와 명군을 습격하는 등 우리측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이듬 해 모문룡에게 해도(海島)로 옮길 것을 종용, 마침내 철산의 남쪽 70리에 있는 가도(일명 皮島)에 진을 옮기게 되었다. 1623년(인조 1)명나라는 후일을 도모하고자 가도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모문룡을 그 도독으로 임명했으며 명칭도 동강진(東江鎭)이라 칭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경과
이듬해에 다시 진을 선천의 신미도(身彌島)로 옮기고 운종도(雲從島)라 하였다. 모문룡은 그의 조정에 거짓으로 승전을 보고하는가 하면 우리측에 자주 군량을 요청, 따르지 않으면 갖은 약탈을 자행하였다. 또한 우리측을 중상하여 조선과 명나라 사이를 이간하므로 점점 적대시하게 되었다.
후금은 작전상 그들의 후방을 교란시킬 목적으로 조선에 진을 치고 있는 명군을 공략,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마침내 1627년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그 뒤 명나라 조정의 명에 따라 모문룡은 후금을 정벌하기 위하여 요동으로 출전했으나 실패하고, 요동경략 원숭환(袁崇煥)에 의해 여순(旅順)의 쌍도(雙島)로 유인되어 1629년 살해되었다.
유격장군 진계성(陳繼盛)이 무리들을 영솔했으나, 만주에서 도중(島中)으로 도망 온 유흥치(劉興治)가 이를 죽이고 대신 영솔하더니, 심세괴(沈世魁)가 흥치의 목을 베고 도독이 되었다.
1637년 청나라는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을 보내어 세괴를 치려고 한다면서 조선에 군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평안병사 유림(柳琳)과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을 보내 토벌하였다. 이로써 조선·명·후금 사이에 미묘하게 작용했던 가도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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