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전투 ()

봉오동전투 지역
봉오동전투 지역
근대사
사건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
내용 요약

봉오동전투는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이다. 전투는 홍범도와 최진동이 이끄는 독립군이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격파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군을 유인해 낸 독립군은 일본군 120명을 사살한 뒤 일본군을 계속 봉오동으로 유인하는 작전을 펼쳤다. 연합부대를 재편성하여 봉오동 계곡에 매복해 있던 독립군은 일본군이 포위망에 들어서자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일본 정규군 157명을 사살하고 200여 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이 압도적인 전승의 원인은 독립군의 앙양된 사기와 지휘관의 예지, 뛰어난 작전계획에 있었다.

정의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
역사적 배경

1920년 6월 4일 독립군 홍범도(洪範圖) · 최진동(崔振東, 일명 明錄) 부대의 1개 소대가 북간도 화룡현(和龍縣) 월신강(月新江) 삼둔자(三屯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소대 규모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 · 격파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의 국내 진입전과 대안(對岸)의 독립군의 활발한 활동에 방비책을 강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양동의 전투는 대전투의 도화선이 되었다. 급보를 받은 일본군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는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반격전을 전개하였다.

독립군사령부는 1개 소대를 삼둔자 서남쪽 봉화리(烽火里)에 매복시켰다. 그리고 약간의 병력으로 총격전을 벌이면서 일본군을 유도하였다. 일본군이 잠복해 있는 독립군 부대 앞까지 추격해왔을 때가 6월 6일 오전 10시였다.

독립군은 100m 고지에서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60명을 사살하였다. 이때 독립군 2명이 전사하고 재류동포 9명이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 전투에서 발군의 전공을 세운 이화일(李化日) 소대장의 교묘한 유도작전은 높이 평가된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 제19사단장은 보병 소좌 야스카와(安川二郎)가 지휘하는 보병 및 기관총대 1개 대대를 출동시켰다. 홍범도 · 최진동 등 독립군 수뇌부에서는 열세한 병력으로 우세한 적과 대결하려면 작전상 요지를 점령하는 것이 최상책이라 판단하였다.

그리고 북편으로 퇴각하여 안산(安山) 촌락 후방 고지에서 수세를 취하였다. 6월 7일 새벽 야스카와 부대가 전방 300m의 텅빈 안산 촌락으로 돌입하자 잠복 중이던 독립군이 일제히 총격을 가하였다. 야스카와 부대는 니히미(新美) 중대와 합세하여 응전했으나 지리적 악조건과 불의의 기습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다시 대오를 정비한 야스카와 부대는 야마자키(山崎) 중대를 주력으로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야스카와 부대가 고려령(高麗嶺) 서방에 도착했을 때, 북방 및 동북방 고지에서 매복하고 있던 소수 독립군의 치열한 사격을 받고 참패를 당하였다.

일본군은 안산과 고려령 두 전투에서 120명의 전사자를 낸 뒤에도 거듭 독립군의 유도작전에 말려들어 봉오동으로 유인되었다. 봉오동 전투는 삼둔자 부근 전투에 이어 전개되었다.

경과와 결과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40리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령의 험준한 산줄기가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쳐진 장장 수십 리를 뻗은 계곡 지대이다. 봉오동에는 100여 호의 민가가 흩어져 있었는데 독립군 근거지의 하나로서 최진동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 민가는 상촌(북촌) · 중촌(남촌) · 하촌 등 3개 부락에 흩어져 있었으며, 상촌은 봉오동을 대표하는 곳으로 독립군의 훈련장이 있었다.

독립군은 6월 7일 아침부터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해 홍범도와 최진동의 연합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1 · 2 · 3 · 4중대의 각 책임자로 이천오(李千五) · 강상모(姜相模) · 강시범(姜時範) · 조권식(曺權植)을 정하였다. 그리고 별도로 2개 중대를 두었다. 안무(安武)는 사령부 부관으로, 이원(李園)은 연대부 장교로, 최진동을 사령관으로, 홍범도를 연대장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이는 형식에 불과하고 실제로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사람은 홍범도 장군이었다. 작전 진행은 다음과 같다. 제1중대는 상촌 서북단에, 제2중대는 동쪽 고지에, 제3중대는 북쪽 고지에, 제4중대는 서산 남단 밀림 속에 매복하도록 하였다.

연대장 홍범도는 직접 2개 중대를 인솔하고 서남산 중턱에 위치하여 일본군의 선봉이 봉오동 어구를 통과하도록 유도하도록 하였다. 일본군 주력 부대가 독립군이 잠복한 포위망에 들어설 즈음에 일제히 사격을 단행하도록 하였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작전계획대로 봉오동 상촌 독립군 700명이 잠복해 있는 포위망 가운데로 들어왔다. 홍범도 장군의 명령에 따라 동 · 서 · 북 3면에서 협공하니 일본군은 갈팡질팡하면서 쓰러졌다.

오후 3시 소좌 야스카와는 가미야(神谷) 중대와 나카니시(中西) 소대를 지휘하여 동쪽 고지에 매복한 강상모 중대를 향하여 반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강상모 중대는 이를 격퇴하여 100여 명을 사살하였다. 여기서 일본군은 온성 유원진(柔遠鎭)으로 패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의 전사자와 200여 명의 부상자를 냈다.

반면 아군은 장교 1명, 병졸 3명이 전사하고 약간의 부상자를 냈을 따름이다. 이 압도적인 전승의 원인은 독립군의 앙양된 사기와 지휘관의 예지, 지리적 요지를 선용한 뛰어난 작전계획에 있었다.

의의와 평가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 · 최진동 부대가 일본군 정규군을 대패시켜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킨,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전과 중 하나이다.

참고문헌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1(한국일보사, 1987)
『독립운동사』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독립신문(獨立新聞)』(상해판)
『동아일보(東亞日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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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이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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