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인수(仁叟). 아버지는 직장(直長) 김첨언(金添彦)이다.
효행으로 향리인 함경도 영흥에서 이름이 높아 1455년(세조 1)에 효렴(孝廉: 효도와 청렴함)으로 천거되어 영흥에 있는 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을 제수받았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67년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함경도 일대가 이에 호응하였는데, 영흥에서도 난민(亂民)이 영흥부사 김을손(金乙孫)을 포위, 살해하려는 등 소요를 일으켰다.
그 때 거짓으로 난민과 합세하는 척하면서 김을손을 숨겨 도망치게 하였다. 이 공로로 난이 진압된 뒤 도총사(都摠使)인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의 천거를 받아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가자(加資)되었으며, 거산찰방(居山察訪)에 보임되었다.
그 뒤 수성찰방(輸城察訪)·고산찰방(高山察訪) 등을 역임하였다. 1469년(성종 1) 향리인 영흥이 부(府)에서 강등되어 도호부(都護府)가 되고, 함흥군이 부로 승격되었다.
계수관(界首官)이 되는 행정상의 통속관계가 뒤바뀌게 되자, 영흥은 태조가 탄생한 곳이라는 점을 들어 글을 올려 영흥부를 그대로 존속하게 하였다. 숙종조에 남구만(南九萬)이 함경도관찰사로 재임하면서 공훈을 추계하여 예조정랑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