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인 윤추(尹推, 16321707)의 자(字)는 자서(子恕), 호(號)는 농은(農隱)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소론(少論)의 주요 학자인 윤선거(尹宣擧, 16101669)의 둘째 아들이며, 소론의 영수인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의 동생이다. 유년기에 윤선거가 충청남도 금산(錦山)으로 은거하자, 그곳에서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 · 이유태(李惟泰) · 윤선거와 함께 충청도의 오현(五賢)으로 일컬어지던 유계(兪棨, 16071664)의 제자가 되었다. 이후 니산(尼山)에 은거하여, 40세에 과거 공부를 단념했다. 농은이라는 당호(堂號)를 정한 것도 이 시기이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다가, 정산현감(定山縣監) 등 지방관에 제수되어 여러 차례 사직하거나 나아가지 않는 등, 노소론(老少論)의 당쟁 속에 진퇴(進退)를 반복하다가 사망했다.
『농은유고』의 초고를 편집한 윤동수(尹東洙, 16741739)는 윤추의 손자로, 윤증의 문집인 『명재유고(明齋遺稿)』의 간행도 주도한 바 있다. 『농은유고』를 최종적으로 교정하여 그 체재를 완성한 윤형규(尹馨圭, 17631840)는 윤추의 족현손(族玄孫: 고손자뻘)이다. 정확한 이력은 미상이다.
윤형규가 지은 『농은유고』의 발문(跋文)에 의하면, 윤추의 시문 초고를 윤증이 정리했고 윤동수가 교정하였지만, 아직 간행되지 못한 채로 집안에 보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윤추의 6대손 윤자일(尹滋一, 1793~1860)이 집안에서 보관하던 초고를 가지고 윤형규에게 가서 다듬고 정리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에 윤형규가 시(詩) 일부 작품을 삭제하고 문(文) 전체를 보존하여 『농은유고』의 체재를 정했다. 발문이 작성된 시기는 “무인년(戊寅年)”, 즉 1818년(순조 18)이므로, 이때에 『농은유고』가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농은유고』의 간행 시기에 대해서는 이설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윤형규가 편차한 윤동수의 문집 『경암유고(敬庵遺稿)』에 “다이쇼 5년〔大正五年〕”, 즉 1916년이라는 간기(刊記)가 있다. 이 『경암유고』는 한국문집총간 『농은유고』의 저본이 되는 규장각 소장본 『농은유고』와 동일하게 상하내향백어미(上下內向白魚尾), 10행 20자,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 약 22×16 cm 전후의 판식으로 되어 있으며, 동일한 자형(字型)의 목활자(木活字)로 인쇄되었다. 이를 근거로 『농은유고』 역시 『경암유고』와 함께 1910년대에 간행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어 있다. 하지만 미국 버클리대학교〔UC Berkeley〕 동아시아도서관에 상하향백어미(上下向白魚尾)로 된 목판본이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1818년에 목판본 초간본이 간행된 이후에 1910년대에 다시 목활자본이 간행되었을 가능성도 제기할 수 있다.
원집(原集) 4권, 별집(別集) 2권, 총 6권 3책으로 구성된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권1에는 형인 윤증에게 차운한 「차백씨운(次伯氏韻)」을 시작으로, 소상팔경(瀟湘八景) 등 146수의 한시가 수록되었다.
권2에는 이어서 한시 108수, 소장(疏狀) 3편, 서(書) 17편이 수록되었다. 한시 중에는 윤증과 스승인 유계 등의 시에서 차운한 것이 많고, 병중(病中)의 감회 등을 서술한 작품도 많다. 여러 작품에 작은 글씨를 두 줄로 쓴〔小字 雙行〕 주석으로 창작 배경을 기록해 두었다. 권2의 서는 모두 윤증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3에는 서(書) 59편이 수록되었다. 권3의 서는 윤추의 사돈이자 윤선거의 제자인 나량좌(羅良佐, 1638~1710)에게 보낸 편지들로, 송시열의 문인들이 공격하는 것에 대응하기 위한 변무소(辨誣疎) 등, 노론 · 소론 당쟁의 첨예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 있다.
권4에는 잡저 · 잠(箴) · 상량문 · 서(序) · 기 · 후(後) · 제문 · 묘표 · 행장 등이 수록되었다.
부록으로 손자인 윤동수가 지은 행장(行狀), 형 윤증이 지은 묘표와 유사(遺事), 또 윤동수가 지은 유사, 끝으로 윤형규의 발문이 수록되었다.
별집의 권1은 「청송재변록(靑松齋辨錄)」 상, 권2는 「청송재변록」 하인데 변무사기(辨誣私記)로 구성되어 있다. 「청송재변록」 상의 「북소옥소변(北疏沃疏辨)」은 아버지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살아 나온 일을 송시열 등이 비방하자, 윤추의 형인 윤증이 이에 대해 변호했었고, 송시열의 문인 최신(崔愼)과 옥천서원(玉川書院)의 유생 등이 북소와 옥소로 이에 대해 다시 따지고 공격해 오자 그 내용을 재차 상세히 변론한 것이다. 「청송재변록」 하에 「송이문답변(宋李問答辨)」 등이 있는데, 그 내용은 송창규(宋昌奎) · 이희조(李喜朝) 등이 아버지 윤선거를 비방한 데 대하여 변호하는 글과 소론의 거두인 형 윤증이 노론으로부터 탄핵을 받은 사실을 변박하는 글이다. 이 「송이문답변」이나 「후동문답변(後洞問答辨)」 등은 송창규나 이희조가 송시열과 문답한 것이 아니라, 송시열이 자작(自作)하여 문답한 것처럼 꾸몄다고 주장하였다.
이 문집은 17~18세기의 노론과 소론의 정쟁(政爭)을 살펴보는 데 참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