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속장경 제1편 38투 2책에 수록된 것을 저본으로 삼아 교감한 글이 『한국불교전서』 1책과 『대정신수대장경』 33책에 수록되어 있다. 속장경에 수록된 글은 경도대학소장본(京都大學図書館所藏本)으로 명치(明治), 대정(大正) 시기의 사본(寫本)으로 추정된다.
종래 본서는 반야부 경전 중 구마라집이 한역한 『마하반야바라밀다경』의 핵심 요지를 설한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새로운 연구에 의해 이 경전에 한정되지 않고 현장이 한역한 『대반야바라밀다경』 600권을 비롯한 반야부 경전을 두루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본서에 나오는 "이 경(此經)"이라는 말에서 '경'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면, 두 가지 경이 모두 해당된다는 것이 그 결정적 증거가 된다. 이렇게 본서에서 『대반야바라밀다경』을 인용하고 있는 것에 따르면 본서의 성립 연대는 현장이 본경을 역출한 663년 이후로 추정할 수 있다. 다만 그 하한선은 확정할 수 없다.
원효는 모두 여섯 가지 문을 설립하여 반야부 경전의 핵심 요지를 밝히고 본경과 관련하여 자신의 독자적 견해를 밝혔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의를 서술한 부분[述大意]이다. 원효는 본서에서 반야부 경전의 대의에 대해서 " 반야를 종지로 삼으며 말함도 없고 보임도 없으며 들음도 없고 얻음도 없으면서 모든 희론을 끊는 격언(格言)이다. 보임이 없으니 보여 주지 않는 것이 없고 얻음이 없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것도 없다. 육바라밀의 온갖 보살행이 여기에서 원만해지고 오안(五眼)의 온갖 공덕이 여기에서 생겨나니, 보살의 중요한 곳간이고 모든 부처님의 참된 어머니이다."라고 설명하였다.
둘째, 경의 근본 뜻을 나타낸 부분[顯經宗]이다. 원효는 이 경이 반야를 종지로 삼는다는 것을 거듭 설하고, 반야를 문자반야(文字般若) · 실상반야(實相般若) · 관조반야(觀照般若)의 셋으로 구별한 뒤에, 문자반야는 단지 뜻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이고, 뒤의 두 반야는 문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뜻이기 때문에 이 경은 이 두 가지 반야를 종지로 삼는다고 하였다. 다음에 실상반야의 상(相)을 설명하고, 관조반야의 상을 설명하며, 두 가지 반야를 종합하여 설명하였다.
먼저 원효는 실상반야를 제법실상(諸法實相)으로 파악하고, 이 실상에 대해서 예로부터 일체가 실(實)이라는 설과 일체가 비실(非實)이라는 설, 일체가 실이기도 하고 비실이기도 하다는 설, 일체는 실도 아니요 비실도 아니라는 설의 네 가지 통설이 있음을 말한 다음, 『대반야바라밀다경』 「반야이취분(般若理趣分)」에서 일체유정이 모두 여래장이라고 설한 글을 인용하여 여래장(如來藏)이야말로 실상반야라는 설을 내놓고 있다.
이는 원효 사상의 특징을 이루는 것으로서 그의 반야에 대한 이해의 독창성을 드러내고 있다. 원효는 「반야이취분」을 인용한 후에 이어서 『보성론(寶性論)』 · 『승만경(勝鬘經)』 · 『섭대승론(攝大乘論)』 · 『불성론(佛性論)』 등 여래장 사상 계통의 문헌을 원용하여 다각적으로 설명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는 중생의 마음이 단순히 실이냐 비실이냐 하는 논의를 한 계단 넘어선 해석으로, 반야를 단순한 추상적 논리의 차원에서 구체적 실생활과 연결시켜 실천적 원리로 이해하는 입장을 보여 준 것이다. 원효는 여래장 그 자체 안에 훈습력(薰習力)이 있기 때문에 중생이 고(苦)를 피하고 낙(樂)을 구하는 일을 일으키며, 모든 선한 일들을 보다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행하는 선심(善心)을 일으키게 된다는 독특한 해석을 가하였다.
관조반야에서는 보살이 초발심(初發心) 때부터 일체종지(一切種智)를 구하다가 그 중간에 제법실상을 깨닫게 되며, 이것을 반야바라밀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 과정에서 반야바라밀의 상은 무루혜안(無漏慧眼)이라는 설과 유루혜라는 설, 유루이기도 하고 무루이기도 하다는 설, 상이 있을 수 없다는 네 가지 설이 이전부터 있었음을 밝히고, 이를 수행의 깊이에 따라 배열하였다.
두 가지 반야를 종합하여 설명한 부분에서는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두 가지 반야를 가설하였지만 주체와 대상을 벗어났기 때문에 이 둘은 결국 차이가 없다고 하였다. 뒤에서는 관조반야에 견분(見分), 상분(相分), 자증분(自證分)이 있다고 하는 경우, 또 없다고 하는 경우, 반야의 본성에 대한 설명과 어긋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어서 그에 대한 바른 이해를 설명하였다.
셋째, 제목을 해석하는 부분[釋題名]이다. 여기에서 본서의 제목인 '대혜도'가 차례대로 마하, 반야, 바라밀의 의역어라는 것을 밝히고, 대(大) · 혜(慧) · 도(度) 세 낱말의 의미를 풀이하였다. 먼저 ‘대’의 의미를 훌륭한 힘이 있으므로[勝力], 많이 들을 수 있으므로[多聞], 큰 사람을 낳으므로[大人], 큰 결과를 주므로[大果]라는 네 가지 뜻으로 상세히 해석하였다. ‘혜’의 의미는 모든 경계를 충분히 깨닫고[解了], 일체법 가언성상(可言性相)을 깨뜨린다[破壞] 등 열 가지 뜻을 열거하고, 이것을 줄여서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아니라는 입장에서 말하면 혜는 관조반야라 할 수 있고, 둘이 없다는 입장에서 말하면 실상반야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도피안(到彼岸)을 뜻하는 ‘도’에 대해서는 생사의 차안(此岸)에서 열반의 피안에 도달한다는 뜻, 유상(有相)의 차안에서 무상(無相)의 피안에 도달한다는 뜻, 미만지(未滿智)의 차안에서 구경지(究竟智)의 피안에 도달하다는 뜻, 유(有)라는 차안에서 무(無)라는 피안에 도달하다는 뜻 등 네 가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넷째, 경을 설한 인연을 밝힌 부분[明緣起]이다. 원효는 『대지도론』에서 『마하반야바라밀다경』을 설한 인연을 질문한 것을 제시하고 『대지도론』에서 답변하면서 설한 다양한 인연 중 요점을 여섯 가지로 추려서 설명하겠다고 하였다. 그 여섯 가지란 첫째는 널리 보살행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모든 하늘의 요청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이며, 셋째는 부처님 혼자서 무량 · 무수한 제법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을까 의심하는 이들의 의심을 끊어 주기 위해서이고, 넷째는 외도(外道)나 악사(惡師)에 의해 오도되어 생긴 중생의 병을 고쳐 주기 위해서이며, 다섯째는 제일의제(第一義諦)를 설해 주기 위해서이고, 여섯째는 모든 논의사(論議師)를 굴복시키고 불법에 신심을 내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섯째, 불교의 여러 학설이 같지 않음을 분류, 판단한 부분[判敎]이다. 원효는 기존의 교판론으로 두 가지 교판, 곧 혜관(慧觀)의 2교 5시설과 법상종의 3종 법륜 두 가지 교판을 거론하고, 이 두 가지 교판에서 반야부 경전을 제2시에 배대한 것을 비판하는 데 주력하였다. 먼저 2교 5시설에 대해서 "첫째는 돈교(頓敎)이고, 둘째는 점교(漸敎)이다. 점교에 다섯 시기가 있다. 첫째는 사제교(四諦敎)이고, 둘째는 무상교(無相敎)이고, 셋째는 억양교(抑揚敎)이고, 넷째는 일승교(一乘敎)이고, 다섯째는 상주교(常住敎)이다. 이는 얕은 것에서 깊은 것으로 차례대로 설한 것이다. 이제 이 경을 비롯한 모든 반야의 가르침은 두 번째 시기에 해당하며, 무상교라고 부른다."라고 하였다.
다음에 3종 법륜에 대해서는 『해심밀경』에서 "첫 번째 시기에 오직 성문승(聲聞乘)을 발취(發趣)하게 하기 위하여 사제상(四諦相)으로 전법륜(轉法輪) 하였다. 두 번째 시기에 오직 대승을 닦는 자들만을 발취하게 하기 위하여 은밀상(隱密相)으로 전법륜하였다. 세 번째 시기에 일체승(一切乘)을 발취하게 하기 위하여 현료상(顯了相)으로 전법륜하였다."라고 한 것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반야교는 여기에서 제2시에 속한다고 하였다.
원효는 이 두 가지 교판이 모두 도리가 있기는 하지만 반야경을 두번째 시기로 분류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하여 비판하였는데 그 내용을 몇 가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반야경』이 『법화경』보다 나중에 설해졌다는 것은 『대지도론』에서 "수보리가 『법화경』에서 무퇴(無退)를 설하는 것을 듣고 다시 『반야경』에서 유퇴(有退)를 설하는 것을 듣고, 서로 모순되는 것에 의문을 느껴 부처님에게 질문하자 부처님께서 성문인이 모두 성불하니 이와 같다면 무퇴라고 하였다."라는 글과 어긋나기 때문에 옳지 않다.
두 번째, 『반야경』은 오직 대승인을 위한 가르침이라는 법상종의 판석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반야경』에는 “삼승의 보리를 구하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 반야바라밀에 삼승의 가르침이 있다.” 등의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법상종에서는 『반야경』이 자성열반(自性涅槃)을 밝힐 뿐, 자성열반의 무자성성(無自性性)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비요의(非了義)이고 제2시라고 하였는데, 『반야경』에서 “자성열반의 무자성성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그 말을 들으면 모두가 놀라고 두려워할까봐 그런 것일 뿐이고 본질은 무자성성에 있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미 무자성성을 밝힌 것으로 보아야 하고, 따라서 비요의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원효는 『반야경』이 요의경(了義經)임을 보이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경주한 후에, 마침내는 『화엄경』에서 “생사와 열반, 이 둘이 모두 헛되며 어리석음과 지혜로움도 또한 이와 같아서 둘에 다 진실함이 없다.”라고 했고, 『반야경』에서 “물질과 받아들임과 표상 작용 등은 허깨비와 같으며 꿈과 같다. 열반에 이르기까지도 허깨비 같고 꿈 같다. 만약에 어떤 법이 열반보다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또한 다시 허깨비 같고 꿈 같다고 말하겠다.“라고 한 점을 들어, 『반야경』과 『화엄경』을 사상적으로 동일한 맥락에 있는 것이라고 파악하고 양자를 동일한 지위에 있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여섯째, 본문을 풀이한 부분[消文]이다. 이 부분에서는 단지 "논에 의해 자세하게 해석한다."라고 하는데 그치고 다른 내용은 서술되어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