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자 인중(仁仲), 호 미암(眉巖) 또는 연계(漣溪), 시호 문절(文節), 본관은 선산(善山)으로 유양수(柳陽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공준(柳公濬)이다. 아버지는 유계린(柳桂鄰)이며, 어머니는 사간 최부(崔溥)의 딸이다.
1538년(중종 33)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1544년 사가독서한 뒤 수찬(修撰), 정언(正言) 등을 역임하였다. 1547년(명종 2) 양재역(良才驛)의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 종성, 은진 등으로 유배되었다가 1567년 해배된 이후 장령(掌令), 대사성(大司成), 부제학(副提學), 이조참판 등을 지내다 1575년(선조 8) 낙향하였다. 김안국(金安國)· 최산두(崔山斗)의 문인으로 외할아버지 최부의 학통을 계승해 이항(李恒)· 김인후(金麟厚) 등과 함께 호남지방의 학풍 조성에 기여하였다.
21권 10책. 목판본.
저자가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종성에서 유배되어 있을 때 지은 시고(詩稿) 1권을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인 한준겸(韓浚謙)이 얻어 스스로 교정하여 종성에서 1612년(광해 4)에 간행하였다고 한다( 『누판고(鏤板考』)). 그러나 이 시고를 비롯한 유고와 많은 시문이 전란을 거치면서 산일되었다. 다만 권1 시제(詩題) 아래에 “종성원간(鍾城原刊)”이란 주(註)가 달려 있어 약 120여 수의 시(詩)가 시체별(詩體別)로 편차된 1권이 한준겸이 간행한 시고일 것으로 추측된다.
9대손 유경심(柳慶深)은 유경인(柳慶寅)과 함께 수집한 시문(詩文) 약간과 「미암일기(眉巖日記)」를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교정을 받아 10책으로 편차하고 1850년(철종 1) 판각을 마쳤으나 죽어 도중에 중단되었다. 이에 사손(祀孫) 유정식(柳廷植)이 1866년(고종 3) 다시 시작해 기정진과 윤치희(尹致羲)의 서문과 유경집(柳慶集)의 발(跋)을 실어 1869년에 20권 10책으로 인행하였다. 이후 저자가 배향된 담양(潭陽) 의암서원(義巖書院) 사액(賜額) 기사를 수록한 속부록(續附錄)을 권21로 편차하고, 송병선(宋秉璿)의 발문(跋文)을 추가하여 21권 10책으로 1897년(광무 1)에 활자로 추보하였다.
권수(卷首)에는 저자가 헌근록(獻芹錄)을 지어 올린 데 대한 선조(宣祖)의 비망기(備忘記)와 1577년(선조 10)에 내린 치제문(致祭文), 1669년(현종 10)에 내린 사제문(賜祭文)이 실려 있고, 이어 1849년(헌종 15) 기정진이 지은 서(序)와 1866년(고종 3) 윤치희가 지은 서문이 있다.
권1~2는 시 278수로, 권1은 종성(鍾城)에서 간행한 시고(詩稿)이고, 권2는 보유(補遺)로 특히 송부인(宋夫人) 송덕봉(宋德峰)과의 차운시가 부기(附記)되어 있으며, 종성 유배 시기와 은진(恩津) 유배 시기, 복직(復職) 이후 즉 1566(명종 21), 1567년 이후의 작품이 각각 표시되어 있다.
권3은 소(疏) 5편, 서장(書狀) 7편, 서(書) 17편, 서(序) 3편, 기(記) 1편, 발(跋) 2편, 명(銘) 5편, 제문(祭文) 8편, 갈(碣) 2편, 잡저(雜著) 6편이 실려 있다. 이 중 소는 헌근록(獻芹錄)을 올리며 지은 전(箋)과 사직소 등이며, 서장은 사직을 청하는 글과 왕의 하사품을 사양하는 글 등이다. 서(書)는 사돈인 김인후 등과 주고받은 편지로서, 이준경(李浚慶), 양응정(梁應鼎)이 보낸 글도 부기되어 있다. 서(序), 기, 발은 스승 김안국의 『모재집(慕齋集)』, 외조부 최부의 『표해록(漂海錄)』과 『회재문집(晦齋文集)』」에 대한 것이다. 갈문은 저자의 부친과 모친에 대한 묘갈문이다.
잡저 중 「속몽구제(續蒙求題)」는 이안평(李安平)의 「몽구(蒙求)」를 보고 감명을 받아 「속몽구(續蒙求)」를 찬(撰)하였다는 글로 1558년에 쓴 것이고, 「속휘변(續諱辨)」은 경서(經書)에 나오는 잘못된 휘자(諱字)를 논한 것이다. 「주자문집어류 교정범례(朱子文集語類 校正凡例)」는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어류(語類)』의 교정을 끝내고 1575년(선조 8)에 쓴 것이다.
권4는 정훈(庭訓)으로 「십훈(十訓)」과 내편(內篇), 외편(外篇)으로 편차되어 있다. 「십훈(十訓)」은 기상(氣像)·질욕(窒慾)·사친(事親)·제가(齊家)·수신(守身)·처사(處事)·지인(知人)·접물(接物)·계사(戒仕)·회천(誨遷)·문학(文學) 등을 열거하고, 자손들의 일상생활을 가르쳐 인도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논술하였다. 이것은 유희춘이 아버지 규린(珪鄰)으로부터 받은 교훈을 기록해 일생 동안 깨우쳐 반성하는 자료로 삼은 것이기도 하다. 끝에 ‘연계옹서(漣溪翁書)’라 쓴 것을 보면 연계라는 별호도 있었던 것 같다.
권5∼14는 일기, 은진 배소(配所)에서 사면령을 받은 무렵부터 시작되어 임종 이틀 전까지의 기록으로서 가정 혹은 조정에서 저자의 생활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권15∼18은 「경연일기(經筵日記)」이다. 「경연일기」는 일기 원본 중에 산재해 있던 것을 모아 별편(別編)으로 초출(抄出)하여 모두 90조를 수록한 것이다. 이 일기의 원본인 자필원본은 현재 전라남도 담양의 종가에 있고, 일제하 조선사편수회에서 이것을 연활자로 간행하였다. 그 중 이 책에 있는 부분이 원본에는 없는 것이 상당히 많은데, 이 책 간행시까지 있던 원본이 그 뒤 일부 유실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여기에 수록된 일기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권19∼21은 부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9에는 노수신(盧守愼)을 비롯하여 당대 명사들이 지은 제문과 만사(輓詞)가 실려 있고, 명신록(名臣錄)과 『죽창한화(竹窓閑話)』에 실린 저자 관계 기록이 채록되어 있다. 권20에는 허봉(許篈)이 지었으나 목록만 있고 본문에는 ‘전문일부전(全文佚不傳)’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문인(門人)인 이호민(李好閔)이 지은 시장(諡狀), 저자를 향사한 충현사(忠賢祠)와 의암서원에 관계된 글로 청사액소(請賜額疏), 향축문(享祝文) 등이 실려 있다. 권21은 속부록(續附錄)으로 사액(賜額)을 청하는 글과 1668년(현종 9) 송준길(宋浚吉)이 사액에 관련하여 소대(召對)에서 아뢴 계사(啓辭) 등이 실려 있다.
권미에 1869년 9대손 유경집이 지은 발(跋)과 1897년 송변선이 지은 발(跋)이 실려 있다.
유희춘의 문집은 유학자로서의 면모와 실천도덕의 이념 등을 엿보게 한다. 특히, 일기는 우리나라에서 유례가 드문 사료(史料)로서 전후 11년에 걸쳐 조정의 공사로부터 개인의 일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겪고 들은 바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선조 초년의 정부 내의 대소 사건은 물론, 중앙과 지방의 각 관아의 기능과 관리층의 내면적 생활상 및 일반 사회의 경제 상태·풍속·습관·문화·물산 등을 알 수 있어, 당시의 정치·경제·문화 등을 이해하는 자료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기록이 불타 없어진 뒤, 『선조실록』을 찬수(撰修)할 때 선조 초년부터 11년간의 사료가 주로 이 책과 이이(李珥)의 「석담일기(石潭日記)」, 기대승(奇大升)의 「논사록(論思錄)」 등을 근거로 편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