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지구(之衢), 호는 만절당(晩節堂). 박문선(朴文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영충(朴永忠)이고, 아버지는 병조참의 박고(朴翺)이며, 어머니는 양성이씨(陽城李氏)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이한(李瀚)의 딸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계공랑(啓功郞),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이 되었다. 1438년 의금부도사를 거쳐, 이듬해 감찰로서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1440년 승문원부교리(承文院副校理), 이듬해 병조좌랑, 1443년 사복시판관이 되었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사복시윤(司僕寺尹)이 되고 이듬해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1453년(단종 1) 판사복시사가 되었다. 이 해 계유정난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좌부승지 · 우승지를 지내고, 1455년(세조 1) 세조의 즉위에 적극 협력한 공으로 도승지에 오르고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이조참판으로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지고 1457년 호조판서로서 명나라 사신 진감(陳鑑)의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다.
이어 형조 · 이조 · 예조의 판서를 거쳐 함길도도순찰사로 나가서는 부령진(富寧鎭)을 설치해 관방(關防)을 튼튼히 하였다. 1459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야인(野人)에게 관작을 준 일에 대해 힐책하러 나온 명나라 사신 진가유(陳嘉猷)의 원접사가 되었으며, 이어 주문 겸 사은사(奏聞兼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2년 이조판서에 오르고, 이듬해 예조판서 겸 대제학이 되었다. 이어 1464년 우찬성을 거쳐 1466년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1467년 함길도에서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이 일어나자 함길도존무사(咸吉道存撫使)가 되어 백성을 존무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어 예조판서를 겸하였다. 이 해 예종이 즉위하자 신숙주(申叔舟) · 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원상(院相)이 되어 승정원에 나가서 서무(庶務)를 의결했으며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에 책록되고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 해 영의정이 되었다.
성품이 청렴했고, 시문에 능했으며, 과문(科文: 율법의 조문)에 특히 뛰어났다. 또한 사체(事體)에 통달하고 전고(典故)에 밝아 명나라 사신들의 접대에는 항상 뽑혔다. 그로 인해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고 한다.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