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천(永川). 초명은 영발(英發). 자는 우문(又文), 호는 운곡(雲谷). 의성 출신. 이수춘(李秀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덕방(李德枋)이고, 아버지는 이의명(李宜明)이며, 어머니는 윤덕은(尹德殷)의 딸이다. 정동필(鄭東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795년(정조 1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규장각의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었으며, 그 뒤 승진하여 순조 때 대사간을 지내고 헌종 초기에는 승지가 되었다.
특히, 1847년(헌종 13)에는 병조참판으로 있으면서 국방태세를 확립하여 외침에 대비하였고, 언로를 개방하여 하의가 상달되도록 주선하는 것과 아울러 근검절약하기를 힘쓰도록 주장하였다.
그 뒤 잇달아 승진하여 지중추부사를 거쳐 기로소에 들어갔다가, 1849년에는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곧 병으로 그만두었다. 시호는 희정(僖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