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아버지는 승지 한구(韓構)이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민비(閔妃)가 폐위되고 희빈 장씨(禧嬪張氏)가 왕비가 되어 남인이 득세하였다.
이때 서인 김춘택(金春澤) 등과 함께 폐비민씨의 복위를 도모하고, 자금을 모아 요로의 인물들을 매수하려다가 1694년 함이완(咸以完)의 고발로 발각되었다.
남인의 영수(領袖)인 우의정 민암(閔黯)이 이 사실을 숙종에게 알리고 옥사(獄事)를 일으켜 김춘택 등 수십 명과 함께 투옥되었다. 이 사건을 갑술옥사라 한다.
그러나 왕이 민비의 폐위를 후회하고 있던 터라 민암을 사사(賜死)한 뒤 그의 일당을 숙청하고, 소론 남구만(南九萬)을 영의정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 해 10월 남구만이 “그들은 대담하게도 환국(換局)을 꾀한 자들이니 용서하지 못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드디어 장살(杖殺)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