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서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형조판서, 대사성,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사빈(士賓)
시호
정문(貞文)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19년(순조 19)
사망 연도
미상
본관
남양(南陽)
출생지
서울
주요 관직
이조참판|형조판서|대사성|예문관제학
정의
조선 후기에, 형조판서, 대사성, 예문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사빈(士賓). 서울 출신. 홍재원(洪在元)의 아들이며, 황해도암행어사 홍승규(洪勝圭)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판관으로 1850년(철종 1) 증광별시 갑과에 급제하였다.

이듬 해 규장각직각으로서 규장각의 관원 후보자 중 권점(圈點)을 행하는 각권(閣圈)에 김병국(金炳國) 등과 함께 올랐다.

이 해 정언이 되어 김정희(金正喜) 등의 처벌을 원하는 소를 올렸으며 홍문록(弘文錄)에도 올랐다. 1852년 부사과의 직위에 있으면서 종묘에서 거행된 추상순종대왕존호가상시(追上純宗大王尊號加上時)에 선교관(宣敎官)으로 참여하여 가자(加資)되었다.

1855년 성균관대사성이 되고, 다시 이조참의를 거쳐 1857년 개성부유수로 임명되었다. 이 해부터 비변사의 예겸당상(例兼堂上)도 맡았다. 1858년 이조참판에 제수되고 1863년에는 도총관·한성부판윤·형조판서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864년(고종 1) 홍문관제학이 되고, 이어 『철종실록』의 교정당상(校正堂上)과 법선도(法善圖) 서문의 제작을 맡았으며, 겸하여 왕과의 진강(進講)을 담당하는 강관(講官)이 되었다.

1865년 예조판서·이조판서에 중임되었고, 이조판서로서 실록을 춘추관(春秋館)에 봉안할 때 의궤당랑(儀軌堂郎)을 맡고 교식찬집당상(敎式纂輯堂上)도 겸하였다.

같은 해 남릉군(南綾君)의 작위로 올린 소에서, 음사(蔭仕)로 벼슬에 나온 자가 많아 인사의 적체 현상이 심하니 수령의 외직 연한을 30개월로 정해 음직자의 적체를 해결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어 형조판서·홍문관제학·감인당상(監印堂上) 등을 지냈다.

1866년 선혜청제조·예문관제학을 역임하는 등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계속 요직에 중용되었다. 1875년 임금이 판서를 역임한 인물들에게 시호를 내릴 때 정문(貞文)이란 시호를 받았다.

참고문헌

『철종실록(哲宗實錄)』
『고종실록(高宗實錄)』
『일성록(日省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집필자
하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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