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쟁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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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모든 논쟁을 화합으로 바꾸려는 불교교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화쟁사상은 모든 논쟁을 화합으로 바꾸려는 불교교리이다. 불교교단의 화합을 위한 화쟁과 불교교리의 화쟁으로 크게 나눠진다. 교단의 화합을 위한 화쟁은 불교의 여러 계율에 잘 나타나 있다. 교리의 화쟁은 우리나라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인데, 신라의 원광과 자장에서부터 그 연원을 찾을 수 있고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원효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중국에도 영향을 끼쳤고 고려의 의천을 비롯한 많은 승려들에게 계승되었다. 화쟁사상은 우리나라 불교의 저변에 깔린 핵심적인 사상으로, 붓다 이후 우리나라에서 꽃피운 찬란한 금자탑으로 평가된다.

목차
정의
모든 논쟁을 화합으로 바꾸려는 불교교리.
내용

우리 나라 불교의 저변에 깔린 가장 핵심적인 사상이다. 불교교단의 화합을 위한 화쟁과 불교교리의 화쟁으로 대별된다. 교단의 화합을 위한 화쟁은 불교의 계율에 잘 나타나 있다.

불교 교단을 뜻하는 상가(saṅgha, 僧伽)는 화해, 화쟁의 의미가 있다. 우리 나라의 승려들이 구족계(具足戒)로 받는 비구 250계, 비구니 348계 중에서도 두번째 군(群)에 속하는 승잔계(僧殘戒)에 화합을 깨뜨리는 것을 경계한 몇 가지 조목이 보인다. 이들 소승계에서는 화합을 깨뜨린다 하여 승려의 직을 박탈하는 바라이죄(波羅夷罪)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승의 보살들에게 주어지는 보살계에는 승단의 화합을 깨뜨리는 죄를 바라이죄로 다루어 엄히 다스리고 있다. 보살의 십중대계(十重大戒)중 제6인 ‘사부대중(四部大衆)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不說四衆過]’, 제7인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헐뜯지 말라[不自讚毁他]’, 제10인 ‘삼보(三寶)를 비방하지 말라[不謗三寶]’ 등의 3계가 이에 해당한다. 신라의 고승들은 승단의 화합을 깨뜨리는 이들 계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교단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크게 노력하였다.

특히, 원효(元曉, 617-686)는 보살의 십중대계 중 자찬회타계를 범하는 것을 가장 큰 허물로 보았고, 승단의 불화합이 이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므로 특히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비구계와 비구니계에서는 쟁론을 없애는 일곱 가지 멸쟁법(滅諍法)을 두었다. 승단에서 쟁론이 일어날 때는 그 해결점을 국법이나 속인에게 맡기지 않고 이 멸쟁법에 의해서 다스리게 되어 있다.

내용은 ① 본인이 있는 데서 잘못을 다스려라, ② 쟁론이 있을 때 잘못을 기억하게 한 뒤 죄를 다스려라, ③ 정신착란으로 논쟁을 일으켰으면 정상으로 회복된 뒤에는 묵인하라, ④ 마땅히 본인의 자백에 의하여 죄를 다스려라, ⑤ 마땅히 죄상을 추구하여 죄를 다스리되 반드시 다수결에 의하여 단죄하라, ⑥ 승단 내에서 파당싸움이 벌어져 잘잘못을 오랫동안 가리지 못할 때는 풀로 땅을 덮듯 불문에 붙여라 등이다.

더 나아가 승가교단의 단체생활의 화합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육화경(六和敬)이 제정되어 실천되고 있다. 육화경의 덕목은 신화경(身和敬) · 구화경(口和敬) · 의화경(意和敬) · 계화경(戒和敬) · 견화경(見和敬) · 이화경(利和敬) 등이다.

신화경은 함께 예배하여 몸의 업을 닦는 것이고, 구화경은 함께 찬영(讚詠)하여 구업(口業)을 닦는 것이며, 의화경은 같은 신심(信心)으로 의업을 밝혀가는 것이고, 계화경은 똑같이 불계(佛戒)를 실천하여 불법을 함께 따르는 것이며, 견화경은 함께 모든 법의 공(空)한 이치를 바로 보고 실천하는 것이고, 이화경은 의식을 함께 하여 이익을 고르게 나누는 것이다.

이 육화경을 실천적인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하여 선종을 중심으로 새롭게 제정되었는데, 이는 우리 나라에서도 승단의 화합이념으로 크게 신봉되었다. 이것을 살펴보면 몸으로 화합함이니 함께 머물러라[身和共住], 입으로 화합함이니 다투지 말라[口和無諍], 뜻으로 화합함이니 함께 일하라[意和同事], 계로써 화합함이니 함께 닦아라[戒和同修], 바른 지견(知見)으로 화합함이니 함께 해탈하라[見知同解], 이익으로써 화합함이니 균등하게 나누어라[利和同均] 등이다.

교리의 화쟁은 우리 나라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 화쟁사상은 신라의 원광(圓光, 542-640)이나 자장(慈藏, 590-658)에서부터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원광은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제정할 때 불교의 승려이면서도 유교를 비롯한 그 시대의 상황에 맞는 윤리관을 제시하였으며, 「걸사표(乞師表)」를 지어 신라에 이익이 돌아오게 함으로써 모든 것을 원융(圓融)의 바탕 아래 무쟁(無諍)으로 나아가게 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 자장은 종파분립을 초월한 통화불교(統和佛敎)의 길을 걸음으로써 우리 나라 불교를 중국 불교와는 다른 독특한 불교로 이끄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계율생활을 엄히 다스려 교화에 진력하였지만, 계율종(戒律宗)이라는 종파를 따로 개종(開宗)하지 않았고, 오히려 화엄사상이나 신라불국토사상(新羅佛國土思想)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그리고 섭론종(攝論宗)이나 정토교(淨土敎)에도 적지않은 관심을 가짐으로써 종파의 분립 없이 통화불교로 교화에 진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광과 자장에 의하여 싹이 튼 화쟁사상은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원효에 의하여 집대성되었고, 일찍이 그 어떤 불교인도 이루지 못하였던 화쟁의 논리를 확립시켰다.

원효는 많은 글을 썼지만 문자나 형식에 사로잡혀서는 안 됨을 강조하는 한편,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깊은 철학과 함께 항상 중생을 구제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평등 가운데 차별이 있으며 차별 가운데 평등이 있다는 화엄(華嚴)의 사상을 쉽게 풀이한 「무애가(無碍歌)」를 지어 뭇 사람의 관심을 끄는 가운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큰 표주박을 두드리면서 노래하며 이 거리 저 마을에 나타남으로써 불교를 생활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평화와 화합이 깃들인 신라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원효는 대중과 함께 살고 고락을 같이하는 가운데 어떻게 하면 대중에게 더 많은 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에 마음을 기울였던 것이다. 화쟁의 원리에 입각하여 행동하였던 그는 저술활동에 있어서도 화쟁사상의 천명에 큰 힘을 기울였다.

불교사상에 관한 것이라면 대승 · 소승을 막론하고 무엇이든 읽고 연구하면서 사색과 체험을 통하여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그 이해한 바를 남김 없이 글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경전마다 종요(宗要)를 지어 그 경전의 특징적인 요지와 함께 다른 경전과도 서로 화합할 수 있는 화쟁의 원리까지 제시하였다.

불교의 이론은 대체로 연기론(緣起論)과 실상론(實相論)의 둘을 바탕으로 해서 무궁무진하게 전개되어 인도에서는 부파(部派)를, 중국에서는 많은 종파가 성립되어 각각의 종지(宗旨)를 고집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런데 원효는 그 어느 교설이나 학설을 고집하지도 버리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나 분석하고 비판하고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논리를 융합하여 보다 높은 차원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았다. 모순과 대립을 한 체계 속에 하나로 묶어 담은 이 기본구조를 가리켜 그는 ‘화쟁(和諍)’이라 하였다. 통일 · 화합 · 총화 · 평화는 바로 이와 같은 정리와 종합에서 온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기도 하였다.

화쟁은 그의 모든 저서 속에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는 기본적인 논리이다. 마치 바람 때문에 고요한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지만 그 파도와 바닷물이 따로 둘이 아닌 것처럼, 중생의 일심에도 깨달음의 경지인 진여(眞如)와 그렇지 못한 무명(無明)이 둘로 분열되고는 있으나, 그 진여와 무명이 따로 둘이 아니라 하여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서 화쟁의 원리를 제시하였다.

『열반경(涅槃經)』에서는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성질을 지니고 있으므로 다같이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하는 한편, 악한 짓만을 일삼는 무리인 일천제(一闡提)는 성불할 수 없다고 설하였다. 중국의 법상종(法相宗)이 일천제의 성불을 영원히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 데 반하여, 원효는 폭을 넓혀 마음의 핵심인 아뢰야식(阿賴耶識)에는 본시 부처가 될 요소인 무루종자(無漏種子)가 있는 것이라 함으로써, 『열반경종요』에서는 일천제도 성불시키는 화쟁의 솜씨를 보였다.

원효가 화쟁에 자주 사용한 방법의 하나는 차원 높은 은밀문(隱密門)과 보다 차원이 낮은 현료문(顯了門)의 두 문을 설정하는 일이었다. 불교수행에 있어서 근본적인 장애를 가져오는 소지장(所知障)과 번뇌장(煩惱障) 등 이장을 끊는 일은 매우 중요하므로 『대승기신론』『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서도 다같이 이 문제를 다루었지만 그 견해는 서로 달리하고 있다.

이에 원효는 『이장의(二障義)』를 지어 대승기신론과 유가사지론의 두 논설을 각각 현료문과 은밀문으로 설정하고, 현료문에 의해서는 은밀문의 소지장을 설명할 수 없어도 현료문의 이장은 번뇌장을 가지고 능히 설명된다고 함으로써 두 논설을 하나로 묶었다. 원효가 주창한 화쟁사상의 근본원리는 인간세상의 화(和)와 쟁(諍)이라는 양면성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화쟁은 화와 쟁을 정(正)과 반(反)에 두고 그 사이에서 타협함으로써 이루어지는 합(合)이 아니라, 정과 반이 대립할 때 오히려 정과 반이 가지고 있는 근원을 꿰뚫어보아 이 둘이 불이(不二)라는 것을 체득함으로써 쟁도 화로 동화시켜 나간다. 천차만별의 현상적인 쟁의 상태도 그 근원에서 보면 하나로 화하는 상태에 있을 뿐임을 체득한 원효는 이 원리에 따라 진망(眞妄) · 염정(染淨) · 이사(理事) · 공유(空有) · 미오(迷悟) · 인과(因果) 등을 불이의 화쟁론으로 전개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원효의 화쟁사상은 이후의 우리 나라 승려들에 의하여 계승되었음은 물론, 중국의 법장(法藏, 643-712)과 징관(澄觀, 738-839) 등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에서도 크게 신봉되어 선주(善珠, 723-797) · 명혜(明恵, 1173–1232) · 응연(疑然, 1240–1321) 등은 그의 설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원효의 화쟁사상을 계승하여 널리 선양한 고려시대의 고승으로는 의천(義天, 1055-1101)이 있다. 그는 원효의 화쟁사상이 『법화경』의 회삼귀일사상(會三歸一思想)과 그 맥을 같이하는 것임을 파악하고, 천태종(天台宗)을 창종(創宗)하여 화엄을 비롯한 여러 교학과 선을 일치 통합하고자 하였다.

그는 화엄종에 속한 승려였지만 당시 화엄종과 법상종에서 각각 성(性)과 상(相)의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쟁론을 계속하였으므로 성상융회(性相融會)를 내세워 이들을 화쟁시키고자 하였다. 나아가 지관(止觀)의 수행을 중시하는 천태종을 창종하여 선종과의 화쟁도 꾀하였던 것이다. 그의 교관병수사상(敎觀幷修思想)은 화쟁의 원리를 가장 잘 채택한 것으로, 우리 나라 불교의 한 전통적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의천이 교의 입장에서 선을 수용하려고 하였던 데 반하여, 지눌(知訥, 1158-1210)은 선을 중심에 두고 교를 통화하려 하였다. 그는 참된 것과 속된 것을 엄격히 구별하였으나 그것이 둘이 아님을 잊지 않았고, 선종의 승려로서 평생을 참선에 몰두하였지만 틈틈이 불경을 읽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지눌은 부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선이요 부처의 말을 깨닫는 것이 교라고 믿었기 때문에 선과 교는 서로 떨어질 수 없고 함께 닦아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당시 세상사람들이 부처의 참뜻을 모른 채 선종이니 교종이니 하고 싸우는 것을 막고자 하였고, 그 무의미한 논쟁을 매듭지어 참다운 수행의 길을 걷게끔 하기 위하여 일생 동안 노력하였다. 오늘날 지눌을 선교합일(禪敎合一)의 주창자요 정혜쌍수(定慧雙修)의 구현자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화쟁정신에 입각한 것이다. 그 이후 우리 나라 불교는 선과 교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의 전통을 계속 유지하게 되었다.

또, 조선 초기의 고승 기화(己和, 1376-1433)는 불교 내의 화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교와 불교와의 화쟁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유불의 논쟁은 고려 때부터 계속되어 온 것이었지만, 고려시대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기 때문에 논쟁이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억불정책으로 불교를 핍박하자, 기화는 『현정론(顯正論)』 ·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 등을 저술하여 억불의 부당성과 함께 유불도 3교의 회통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현정론』의 첫머리에서 유교의 오상(五常:五倫)과 불교의 오계(五戒)를 비교하면서 불살생(不殺生)은 인(仁)이요, 부도(不盜)는 의(義)며, 불음(不淫)은 예(禮)요, 불음주(不飮酒)는 지(智)며, 불망어(不妄語)는 신(信)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유교에서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은 주로 정형(政刑)으로 정형적 교육에는 상벌이 따르고 상벌은 일시적인 복종만을 조장시키는 데 반하여, 불교는 인과법을 가르치기 때문에 각자가 스스로 깨닫고 자각적으로 심복(心服)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그는 세상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어서 상벌로 지도해야 할 사람들도 있고 인과법으로 지도해야 할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유교나 불교가 둘 다 필요하다는 화쟁론을 전개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불교의 중흥조라 일컬어지는 휴정(休靜, 1520-1604)은 지눌의 정혜쌍수를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선과 염불의 일치를 주장하여 선과 교와 염불의 조화를 정착시켰다. 그 뒤 조선시대에는 이 셋을 함께 공부하는 사상적 조류가 계속됨에 따라 우리 나라 불교는 종파를 중심으로 한 사상적 논쟁이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또한, 조선왕조 500년의 억불책 속에서도 불교가 그 혜명(慧命)을 전승할 수 있었던 것도 이 화쟁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그들은 왕실과 유생들의 탄압을 쟁으로 맞서기보다는 화의 정신에 입각하여 쟁을 이겨나갔고, 오히려 쟁을 화로 승화시켜 그들을 교화시켰던 것이다. 화쟁사상은 절대자유와 평화완덕(平和完德)을 그 이상으로 삼은 것으로, 석가모니 이후 우리 나라 불교에서 꽃피우게 된 금자탑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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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화사상(和思想)연구」(김운학 외, 『불교학보』 15, 불교문화연구소,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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