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지도는 전라도 전주부성 내외의 경관과 지리적 형세를 옮겨 그린 회화식 지도이다. 18세기 이후에 제작된 일반적인 군현지도의 내용과 형식을 갖춘 수묵채색화이다. 진경산수화의 유행과 더불어 활발히 제작된 회화식 지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주요 관청 건물과 태조어진이 봉안된 경기전을 비중 있게 처리해 전라도 감영 소재지이자 태조 이성계의 관향임을 강조하였다. 부성 바깥의 영역은 사방의 산악과 크고 작은 물길, 민가로 채워졌고, 민가는 지붕만 드러낸 모습으로 간략히 처리하였다. 회화 작품 못지않은 예술성을 지닌 지도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200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종이 바탕에 수묵채색. 세로 150㎝, 가로 90㎝.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조선 후기 전주부성 내외의 경관과 지리적 형세를 옮겨 그린 회화식 지도이다. 주요 관청 건물과 태조어진(太祖御眞)이 봉안된 경기전(慶基殿)을 비중 있게 처리해 전라도 감영 소재지이자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관향(貫鄕)임을 강조하였다. 부성 외곽을 감싼 산악이나 건물, 수목(樹木) 등 경물 묘사에 산수화법(山水畵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전주지도」는 18세기 이후에 제작된 일반적인 군현지도의 내용과 형식을 갖추고 있다. 상부에 “전주지도(全州地圖)”라는 제목을 묵서하고, 중앙부에 장방형의 전주부성을 포치하였다. 부성 바깥의 영역은 사방의 산악과 크고 작은 물길, 민가로 채워졌다. 견고한 석축으로 둘러싼 성곽 안에 관아와 객사, 경기전 등 핵심적인 공공시설물을 재현하고 명칭을 부기한 반면, 일반 민가는 지붕만 드러낸 모습으로 간략히 처리하였다.
특히 감영과 객사는 점유 면적이 넓을 뿐 아니라 담장과 부속 건물의 배치 상태까지 파악할 수 있다. 객사는 외삼문과 중삼문, 내삼문을 갖추고 있으며, 마당 한가운데 진남루(鎭南樓)라 불린 주관(主館)과 양쪽의 익헌(翼軒)이 뚜렷이 묘사되어 있어 그 규모가 짐작된다. 객사 남쪽에 울창한 숲을 배경으로 감사가 거처하며 도정(道政)을 펼쳤던 감영과 관아 건물들이 밀집되어 있는데, “ 선화당(宣化堂)”이라는 묵서가 확인된다.
부성 남동쪽에 자리한 경기전 일곽도 눈에 띄게 규모를 과장하고 정전(正殿)을 비롯해 출입문과 담장, 부속 건물까지 자세히 묘사하였다. “진전(眞殿)”이라 묵서하여 조선의 창건주 태조의 어진(御眞)이 봉안되어 있는 곳임을 명시하는 동시에 뒤편 잡목 숲 위에 수십 마리의 백로 떼를 그려 넣어 공간의 성격에 맞는 권위를 부여하였다.
화면의 오른쪽 하단 부성의 외곽에서 오목대(梧木臺)와 한벽당(寒碧堂)이 확인된다. 오목대는 발산(鉢山) 아래 솟은 언덕으로 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를 물리치고 돌아오는 길에 잔치를 벌였던 장소로 전해진다. 『여지도서(輿地圖書)』와 『완산지(完山誌)』에 실린 내용을 참조할 때, 오목대는 상부가 평평한 언덕으로 전주성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 기능도 하였다. 이 「전주지도」에는 차일을 친 채 언덕 위에 모여 있는 20여 명의 남녀 인물들이 그려져 있는데, 일산(日傘)과 가마, 구성원의 행색으로 보아 감사행렬로 생각된다. 그 아래쪽 남천(南川) 가에 우뚝 솟은 바위 절벽 위에는 한벽당이 자리하고 있다. 건물 이름을 “閑碧堂(한벽당)”이라 오기하였으나 불규칙한 바위 표면에 맞추어 돌기둥의 높낮이를 조절해 지은 한벽당의 건축적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이외에도 동서남북의 성문과 문루, 활터의 과녁, 하천의 다리 등 제작 당시 전주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지형지물이 확인된다. 또 만개한 복사꽃 나무가 구석구석에 분포하고 있어 화사한 봄날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한편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李翰)과 부인 경주김씨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1771년(영조 47) 경기전 북쪽에 설치한 조경묘(肇慶廟)가 그려져 있지 않아 그 이전에 제작된 지도로 판단된다.
「전주지도」는 일반 회화에 쓰이는 표현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전주성 안팎의 지형지세와 주요 시설물의 구조를 재현한 회화식 지도이다. 산악과 수목, 건물, 인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가 어우러져 있고, 매우 안정적인 회화 기량이 발휘되어 있다. 그 때문에 18세기의 화원(畵員)이자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제자로 알려진 불염재(不染齋) 김희성(金喜誠)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김희성은 화원으로 재직하면서 여러 차례 외직을 지냈으나 전라도에서 근무한 이력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1748년에 당시 전라우수사로 재임하던 전일상(全日祥)의 초상화와 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석천한유도(石川閑遊圖)」를 그린 사실이 있어 그 즈음 김희성도 전라도에 파견되어 근무하면서 「전주지도」를 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현 시점에서 김희성이 그렸다고 확단하기는 어려우나 짜임새 있는 구성, 산악의 피마준(披麻皴)과 미점(米點), 소나무와 잡목의 수지법(樹枝法), 건물의 계화법(界畵法) 등 정통 화법을 익힌 화가의 솜씨임은 분명하다.
전주는 조선시대 전라도 감영이 자리한 호남의 거점 도시였던 만큼 다양한 종류의 지도가 꾸준히 제작되었다. 이 「전주지도」는 18세기 이후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유행과 더불어 활발히 제작된 회화식 지도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1차적으로 제작 당시 전주성 안팎의 자연적 형세와 인문적 경관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경기전을 통해 태조 이성계의 관향이라는 고을의 위상을 명확히 드러낸 점도 주목을 끈다. 아울러 역량이 뛰어난 화가에 의해 그려짐으로써 회화 작품 못지않은 예술성을 지닌 지도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