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인집단은 조선 후기에 민간의 악가무희를 담당했던 공연예술집단을 가리키는 국악용어이다. 연희집단·광대집단이라도 한다. 조선 후기 공연예술에 대한 민간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성행하였다. 예인집단은 천민들로 구성된 기능집단이므로 중인출신 동호인 집단과는 성격이 다르다. 조선 후기의 예인집단은 주류집단과 아류 집단으로 위계가 형성되었다. 주류집단은 독자적인 조직과 학습 프로그램, 개성적 레퍼토리를 가졌다. 19세기 주류집단은 산대패, 창우집단, 사당패 등이 있었다. 아류 집단은 각설이패, 남사당패 등으로 주류집단을 모방하였다.
조선후기에는 다양한 연희집단들이 있었지만 이들의 활동상은 달랐다. 조선시대의 문집 및 가집 그리고 각종 도상 자료에 의하면, 연희집단들 사이에는 연희의 전통과 학습내력, 연희집단의 운영과 창조적 레퍼토리 구성의 차이 때문에 위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19세기 당시 연희집단 중 독자적인 조직과 학습 그리고 개성적 레퍼토리를 구성했던 집단은 산대패, 창우집단, 사당패 등이 있었다. 이 외의 집단 예컨대, 풍각쟁이패, 초라니패, 취승패, 솟대패, 대광대패, 각설이패, 남사당패, 선소리패, 무동패, 곽독 등이다. 이들은 일종의 아류집단을 형성했다.
산대패는 산대도감이 해체된 이후 도성과 그 주변에서 활동했던 연희집단으로 19세기 당시 최고의 연희집단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게우사」에 의하면, 산대패 구성원의 공연료는 당시 광대 보다 약 40% 정도 높았고, 사당패는 광대의 10% 정도 밖에 받지 못했다. 산대패는 극적 구성과 재담 그리고 음악을 두루 갖추고 화려한 소품과 무대 장치로 관람자를 압도했고, 탈춤 및 각종 연희를 담당했다. 근대 극장이 설립되기 전까지 산대패는 서울의 각종 호사스러운 연희를 담당했다.
창우집단은 광대집단이라고도 부른다. 이들은 서울을 제외한 전국 지방에 두루 분포했던 재인청을 기반으로 활동했다. 광대들은 각 지역의 관청에서 신역을 치르기도 했다. 창우집단은 악가무희의 총체적 공연을 담당했는데, 구성원의 재능에 따라 소리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광대, 곡예 및 재담소리를 전담하는 재인, 기악을 전문으로 하는 고인, 춤을 추는 무동의 역할이 나누어진다. 광대는 고사소리, 단가, 판소리 등을, 재인은 줄타기와 재담을, 고인은 삼현육각( 피리, 대금, 해금, 장고, 징) 반주와 심방곡과 같은 기악음악을, 무동은 춤을 추었다. 재인청별로 선생안(先生案)을 두고 지역의 창우들을 조직화했으며 구성원들을 관리했다.
경기이남 출신 광대를 연대기적으로 정리한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의하면, 19세기 이후 광대 중에서 가창으로 일가를 이룬 경우는 동지나 감찰 같은 명예직을 왕으로부터 제수받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세기 후반 안민영의 『금옥총부』에 의하면, 광대는 민간 상류층의 풍류방에 초대되기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송만재의 『관우희』를 통해 과거 급제 후 치러지는 잔치, 즉 문희연에서 광대들이 참여하고 있는 점을 알 수 있다. 천민들은 1894년에 면천했는데, 이 과정에서 신분집단으로서의 창우집단은 해체되었다. 그러나 신분집단으로서의 창우집단이 해체된 이후로도 이들과 관련되거나 이들의 후예들은 최초의 실내극장이었던 희대, 즉 협률사 공연을 통해 가객으로 재탄생되었고 대중적 공연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들은 극장에서 창작 창극 「최병두타령」을 작곡했고, 근대적 남도음악 전문 집단( 경성구파배우조합(1915), 조선성악연구회(1934) 등)을 서울에 결성함으로써 남도음악의 세를 확장했다.
사당패는 여성 중심의 전문 예인집단으로 불교 사찰과 공생관계에 있었다. 사당패들은 안성 청룡사를 위시하여 황해도 구월산의 패업사, 경상도 하동의 쌍계사, 전라도 함열의 성불암, 창평의 다주암, 함평 월앙산, 정읍 동막, 담양 옥천 등에 근거지를 두었다. 사당패는 모갑(某甲)이라는 남성 인솔자와 역시 남성인 거사(居士) 그리고 여성인 사당들이 모인 집단이지만, 공연에서는 여성이 중심에 선다. 김홍도의 「사당유희도(寺黨遊戱圖)」와 신재효의 「박흥부가」 · 「변강쇠가」, 최영년의 「해동죽지」 등을 통해 보면, 사당패는 도회지나 장시를 근거로 공연하며, 화려하게 옷을 차려입고 춤과 노래를 했다. 평안도부터 서울 주변에서 활동했던 사당패와 호남지역을 근거로 활동했던 사당패의 레퍼토리는 약간 다르지만, 정현석의 『교방가요』에 의하면, 사당패의 레퍼토리는 놀량춤 외에 「방아타령」, 「산천초목」 등과 같은 잡가나 민요였다.
한편, 이상과 달리 조직을 정연하게 갖추지 못하거나 소규모로 구성된 연희집단은 다양하다. 풍각쟁이패는 창우집단 가운데 고인들의 활동을 모방했지만, 단소, 해금 등과 같은 소박한 악기만으로 지역의 장시를 다니며 「니나니 가락」 등을 연주했다. 초라니패는 가면금목(假面金目), 즉 금빛 눈동자를 그린 이국적 가면을 쓰고 액맥이 소리를 하면서 민중을 위해 고사소리를 했다. 취승패는 불교와 관련하여 「회심곡」 등을 부르면서 탁발과 유사한 행위를 했던 것으로 보이고, 솟대패나 대광대패는 긴 대나무 위에 오르는 곡예를 펼쳤다. 각설이패는 각 지역의 중소 장시를 배경으로 「장타령」 등을 불렀다. 남사당패는 사당패가 해체될 무렵 거사들로 구성된 공연패이다. 선소리패는 한강이 5강, 8강, 12강 등으로 상업권을 확장해 가는 과정 끝에 사당패 집단을 모태로 한 남성 공연집단이다. 의택이, 종대를 시조로 삼는다. 곽독(郭禿)은 무대 장치를 설치하고 나무로 된 인형을 놀리는[設鵬 戱木人] 즉 꼭두각시 놀음을 하는 인형놀이패를 말한다. 이러한 연희집단들은 연희계의 아류 예인집단으로서 기민하게 민중의 요구에 대응하면서 연희계를 풍요롭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