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일과력(日課曆)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과천과학관, 한국천문연구원을 비롯한 여러 국가 기관들과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관상감에서 매년 여러 종류의 역서(曆書)들을 편찬하고 간행하였다. 그 중에는 상용력(常用曆)인 일과력(日課曆), 해와 달 그리고 오행성(五行星)의 위치를 미리 계산해 놓은 칠정력(七政曆), 왕실 내에서만 사용하였던 내용삼력(內用三曆) 등이 있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것은 매년 간행된 일과력으로, 가장 많이 인쇄되어 일반에 널리 배포되었다. 일과력은 왕실과 조정, 그리고 민간에까지 널리 사용된 상용력이었다.
‘일과력’이라는 말은 1426년(세종 8년)에 임금이 “지금부터는 역서에서 ‘역(曆)’ 자를 쓰지 말고 ‘일과(日課)’라는 말로 쓰라.”라고 명하면서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명칭이었다. 당시 세종의 명령은 모든 역서의 명칭에서 ‘역’ 자를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매년 간행하는 상용력을 ‘일과’로 바꾸어서 부르라는 것이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의 원전 사료에서는 ‘일과(日課)’라고만 지칭하였지 ‘일과력(日課曆)’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일과력’이란 말은 현대 연구자들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이다.
당시 널리 배포되고 사용되는 상용력의 명칭을 ‘일과’로 바꾸도록 한 이유는 이 상용력을 당시 매년 간행하던 또 다른 종류의 역서인 칠정력과 구분하여 호칭하기 위해서였다고 판단된다. 만약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상용력에 대해서 ‘역서’라는 보통명사를 계속 사용한다면, 다른 종류의 역서인 칠정력에 대해서는 분류와 호칭이 모호해지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즉, 매년 간행하는 역서의 종류가 다양해짐에 따라 상용력과 칠정력을 구분해서 부를 필요가 있었고, 상용력에는 ‘역서’라는 보통명사 대신 ‘일과’라는 별도의 호칭을 붙여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1426년(세종 8) 이후부터는, 만약 그해의 간지가 갑진(甲辰)이라면 일반 민간들에 배포되는 상용력은 ‘갑진년(甲辰年) 일과’, 태양과 오행성의 궤도 계산을 담은 칠정력은 ‘갑진년 칠정력’, 왕실 내부에서 사용되는 내용삼력은 ‘갑진년 내용삼력’으로 각각을 구분하여 호칭하기 시작하였다.
일과력에는 일반적으로 당해 연도의 역일(曆日) 정보와 역주(曆註) 정보가 포함된다. 여기서 말하는 역일 정보란 날의 진행, 한 달의 길이, 일과 달의 간지 등과 관련된 내용을 의미하며, 역주 정보란 24절기의 시점, 달의 삭현망(朔弦望)의 시점, 태양의 일출입 시각 등의 천문학적인 정보와 매일의 길흉(吉凶)과 관련된 택일(擇日) 정보들을 포함한다. 특히 천문학 관련 정보에 있어서 일과력은 칠정력과 같은 천체력이 아니었기에, 태양과 달의 운동과 관련된 24절기와 삭현망 정보 정도만을 수록하였고, 태양과 달, 오행성 등과 같은 천체들의 위치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포함하지 않았다.
한편 역일의 정보 혹은 천문학적인 정보를 계산하는 방법을 일반적으로 역법이라고 하는데, 어떠한 역법을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역서의 일반적인 명칭이 정해졌다. 예를 들어, 수시력(授時曆)과 대통력(大統曆), 시헌력(時憲曆) 등이 있다. 수시력은 원나라에서 만들어 사용하던 역법이며, 대통력은 명나라 시기에 만들어진 역법, 시헌력은 청나라에서 새롭게 만들어 사용하던 역법이었다. 따라서 일과력은 사용된 역법에 따라 대통일과(大統日課)나 시헌일과(時憲日課)로 지칭되었다. 즉, 대통력의 계산법을 이용하여 만든 일과력이 대통일과, 시헌력의 계산법을 이용하여 만든 일과력이 시헌일과였다.
일과력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많은 부수로 인쇄되어 민간에까지 널리 배포되어 사용되었던 역서이다. 특히 18세기 초부터 일과력의 인쇄 부수가 급증하기 시작하여, 1724년(경종 4) 이전에 이미 10만 부를 돌파하였고, 18세기 말 정조대에는 38만 부에까지 이르렀다.
일과력은 일반적으로 평년의 경우 15장 30페이지, 윤년의 경우 16장 32페이지로 구성되었다. 1724년 이전에는 금속활자(동활자)로 인쇄되다가 1725년(영조 1) 이후부터는 목판으로 인쇄되기 시작하였다. 일과력의 인쇄 방법이 금속활자에서 목판으로 전환된 이유는 발행 부수가 급증하였기 때문이다.
일과력의 편찬과 간행은 관상감에 소속된 30명 또는 35명의 삼력관(三曆官) 중에서 규정에 따라 선발된 12인의 관원들이 담당하였다. 이들을 삼력수술관(三曆修述官)이라고 지칭하였다. 삼력수술관 12인은 매년 10월 초에 선발되어 2년 뒤에 사용될 일과력과 내용삼력의 편찬을 담당하였다. 그 결과, 매년 간행된 일과력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계산을 담당한 12인의 삼력수술관과 인쇄를 감독한 감인관(監印官) 2인의 명단이 열거되어 있다.
일과력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많은 부수로 인쇄되어 민간에까지 널리 배포되어 사용되었던 역서이다. 일과력의 간행 부수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급증하기 시작하여, 18세기 말에는 38만 부를 초과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일과력의 편찬과 간행은 관상감의 여러 업무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많은 재원이 동원되는 업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