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력청은 조선 후기 관상감에서 역서의 편찬을 담당하는 관원들인 삼력관(三曆官)들의 조직이다. 삼력관은 음양과(陰陽科)를 통과하여 관상감에서 천문학 분과의 업무를 충실하게 수행한 관원들 중에서 취재를 통하여 선발되었으며, 그 정원은 시대에 따라 30인, 35인으로 한정되었다. 삼력관들로 구성된 삼력청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관상감의 핵심 조직으로서 관상감 운영의 실질적인 주체가 되었다. 삼력청은 삼력관들이 근무하는 건물을 가리키기도 하며, 삼력청 건물은 1731년(영조 7)에 관상감 본청 건물 뒤에 건립되었다.
삼력청(三曆廳)은 삼력관들의 조직이다. 조선 후기 관상감에서 역서 편찬 업무는 삼력관들만이 담당할 수가 있었다. 매년 10월 관상감에서는 이듬해에 사용할 일과력(日課曆)과 내용삼력(內用三曆)의 편찬을 담당하는 삼력수술관(三曆修述官) 12인과 칠정력(七政曆)의 편찬을 담당하는 칠정추보관(七政推步官) 12인을 선발하였는데, 이들 삼력수술관과 칠정추보관은 반드시 삼력관들 중에서만 선발될 수 있었다.
삼력관은 음양과(陰陽科)를 통과한 관상감의 관원들 중에서 천문학 분과에서 관련 업무를 충실하게 수행한 이들 중에서 취재(取才)를 통하여 선발되었다. 삼력관이라는 명칭과 역할이 정확히 언제부터 정의되고 확정되었는지는 아직까지 정확히 파악되지는 않는다. 다만 삼력관의 정원이 1741년(영조 17)에 비로소 30명으로 정해졌으며, 이듬해인 1742년(영조 18)에 35명으로 늘어났다가 다시 한참 지난 1798년(정조 22)에 이르러 30명으로 줄어들었다. 한편, 삼력청은 삼력관들이 근무하는 건물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삼력청 건물은 1731년에 관상감 본청 건물 뒤에 건립되었다. 이런 사실들을 토대로, 삼력관이라는 직임과 그 조직인 삼력청은 늦어도 1731년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의 자료를 통해서도, 삼력관이라는 직임이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정도에 설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력관의 선발은 질병이나 사망에 의해 결원이 생길 경우에 취재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삼력관 취재에 대한 규정은 1741년에 삼력관 정원이 처음 정해질 때 함께 만들어졌는데, 이후 18세기 중반을 거치면서 삼력관 취재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 또한 엄격히 한정하기 시작하였다. 즉 1766년(영조 42)부터는 추보관(推步官)과 별선관(別選官) 외에는 삼력관 취재에 응시할 수 없게 하였으며, 나아가 1770년(영조 46)에는 수술관(修述官)을 삼력관 아래에 설치하여 수술관들 중에서만 삼력관을 선발하도록 하였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신임 삼력관의 명단은 임금에게까지 계문(啟文)으로 보고가 되었으며 승인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삼력관 선발 자격 요건의 강화는 18세기 이후에 삼력관들이 맡은 임무와 역할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증거이다.
30명, 혹은 35인의 삼력관들로 구성된 삼력청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관상감의 핵심적 조직으로서 관상감 운영의 실질적인 주체가 되었다. 삼력청은 관상감이 간행하는 매년의 일과력과 내용삼력, 칠정력 등을 편찬하는 업무 전반, 즉 역서들의 계산과 인쇄, 배포의 업무를 전담하였으며, 천문학 분과 외에 지리학과 명과학의 관리들을 선발하고 관리하는 업무를 맡기도 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삼력청의 운영에 관한 자세한 규정집인 『삼력청완문(三曆廳完文)』(1795)과 『삼력청헌(三曆廳憲)』(1826) 등의 자료들이 남아 있다.
삼력청은 삼력관들의 조직으로서 조선 후기 관상감의 운영과 활동의 핵심적인 조직이었다. 삼력관 직임과 삼력청의 설치 및 변화에 대한 이해는 조선 후기 관상감의 운영과 변화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나아가 삼력관과 삼력청에 대해 이해함으로써 조선시대 관서들의 운영과 중인 과학자들의 활동 양상에 대해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