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윤중 ()

어윤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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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인물
개항기 때, 일본에 조사시찰단으로 파견되어 개화정책을 추진하였고, 청나라와 조청상민무륙무역장정을 체결하였으며, 갑오개혁 때 탁지부대신으로 재정개혁을 단행한 문신.
이칭
성집(聖執)
일재(一齋)
시호
충숙(忠肅)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48년(헌종 14)
사망 연도
1896년(고종 33)
본관
함종(咸從: 지금의 평안남도 강서)
출생지
충청북도 보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어윤중은 개항기 조사시찰단 조사, 동래암행어사, 탁지부대신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48년(헌종 14)에 태어나 1896년(고종 33)에 사망했다. 1868년 칠석제에 장원급제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1881년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청나라에 파견되었고, 초기 개화정책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893년 교조신원을 요구하는 동학교도를 ‘민당(民黨)’이라고 지칭하는 등 그들에게 우호적이었다. 아관파천으로 갑오경장 내각이 붕괴한 후 국외로 망명하지 않고 보은으로 피신하였다가 향반 무리의 기습으로 피살되었다.

정의
개항기 때, 일본에 조사시찰단으로 파견되어 개화정책을 추진하였고, 청나라와 조청상민무륙무역장정을 체결하였으며, 갑오개혁 때 탁지부대신으로 재정개혁을 단행한 문신.
개설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성집(聖執), 호는 일재(一齋).  충청북도 보은 출신. 아버지는 어약우(魚若愚)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9세에 어머니를, 16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20세 때인 1868년(고종 5) 지방 유생 50명을 뽑아 바로 전시(殿試)를 볼 수 있게 하는 칠석제(七夕製)라는 자격시험에 장원급제하였다. 이듬해인 1869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정원주서로 임명되어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뒤이어 헌납 · 교리 · 지평 · 필선을 거쳐 양산군수를 역임하였다.

1877년 전라우도암행어사로 임명되어 만 9개월간 전라도 일대를 고을마다 샅샅이 돌아다니면서 지방행정을 정밀하게 조사해 탐관오리들을 징벌하고 돌아왔다. 이때 파격적인 개혁안을 내놓아 국왕과 대신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때의 개혁안에서 전라도 지방 농민의 참상 원인이 조세수탈에 있음을 지적하고, 구체적 해결방안을 제시하였다. ① 잡세혁파, ② 지세제도(地稅制度) 개혁, ③ 궁방전 · 아문둔전제도의 개혁, ④ 환곡제도 폐지, ⑤ 삼수포세(三手砲稅)의 폐지, ⑥ 재결감세(災結減稅), ⑦ 도량형의 통일, ⑧ 지방수령의 5년 이상의 임기 보장, ⑨ 조운선제도(漕運船制度) 개혁, ⑩ 역로제도 개혁 등이다.

고종은 이 개혁안을 경청해 어윤중과 오랫동안 논의했으나, 개혁안은 결국 채택되지 못하였다. 그 뒤 갑오경장 때는 자신의 손으로 더욱 전진된 개혁을 단행하였다.

어윤중이 정계의 주요인물로 등장해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1881년에 일본 국정시찰단인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60명을 일본에 파견할 때 조사(朝士)의 한 사람으로 선발된 이후이다. 박정양(朴定陽) · 홍영식(洪英植) 등과 함께 이 시찰단의 중심 인물이었으며, 재정 · 경제 부문을 담당하였다.

이 무렵에 국내에서는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가져온,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둘러싸고 유생들의 위정척사론이 비등하였다. 때문에 신사유람단의 파견은 극비리에 진행되었으며, 시찰단원의 조사들은 동래암행어사로 발령을 받아 일본으로 출국하였다.

어윤중은 1881년 1월 동래암행어사의 발령을 받고 그의 수행원으로 유길준(兪吉濬) · 유정수(柳定秀) · 윤치호(尹致昊) · 김양한(金亮漢) 등과 통역 · 하인 등을 거느리고 4월 부산을 출항하였다. 나가사키[長崎] · 대판(大阪) · 경도(京都) · 고베[神戶] · 요코하마[橫濱]를 거쳐 동경(東京)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약 3개월간 일본의 메이지유신의 시설 · 문물 · 제도 등 모든 부분을 상세히 시찰하고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다. 다른 조사들은 이 해 7월 귀국하였다. 그러나 어윤중은 자기의 수행원인 유길준과 윤치호를 일본에서 더 공부하도록 남겨둔 뒤, 다른 수행원만 거느리고 한달 더 일본에 체류했다가 청나라 톈진[天津]에 가 있는 영선사 김윤식(金允植)과 합류하기 위해 청나라로 갔다.

이 해 9월 청나라에 도착한 어윤중은 영선사 김윤식과 공학도를 만나보고 중국의 개화정책을 견문하였다.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 등과 회담한 다음 이 해 12월 귀국하였다. 어윤중은 1년간의 일본 · 중국 시찰의 복명서를 국왕에게 제출하였다. 여기서 어윤중은 견문한 사실과 조선의 개화정책을 위한 의견을 개진하여, 초기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882년 귀국한 지 두 달 뒤에 문의관(問議官)에 임명되어 청나라에 다시 파견되었다. 청나라의 이홍장이 조미수호조약의 체결을 강력히 권고하고 그 초안까지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조정에서 그에 대한 문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청나라에 파견되어 있는 공학도들을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어윤중은 이해 4월에 청나라에서 조미통상조약 문제를 심의하고 조미수호조규에 합의하였다. 영국대표와 만나 조영수호조규문제를 독일대표와 만나 조독수호조규문제를 협의하였다. 톈진에 머물러 있는 동안 본국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므로 청군과 함께 귀국했다가 난이 평정된 뒤 다시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이때 이홍장 등이 이미 초안해 놓은 불평등조약인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에 조인하는 굴욕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종래 청나라에 대하여 비교적 호의를 가지고 있던 어윤중이 그 뒤 청나라에 대해 냉담하게 된 것은 이때 청나라가 주장한 종주권의 부당성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1883년에는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임명되어, 조중수륙무역장정에 의거한 북방무역에서 조선 측의 이익을 증진시키며 국경을 튼튼히 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1883년 3월에 청나라 측과 중강무역장정(中江貿易章程)을 협정하였다.

6월에는 회령통상장정(會寧通商章程)을 협정했으며, 도문강(圖門江)과 두만강의 국경지대를 조사하였다. 어윤중의 이러한 활동의 공로가 인정되어 1884년에 서북경략사와 함께 처음에는 병조참판, 뒤에는 호조참판을 겸임하였다.

이 무렵의 활동은 매우 정열적이었으며 눈부신 바가 있었다. 어윤중은 1883년에 20개조로 된 과감한 정부기구개혁안을 제출 하였는데, 이 개혁안은 채택되지 않았다.

어윤중이 잠시 보은에 귀향해 있는 동안에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어윤중은 이 정변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민씨 척족은 어윤중을 중용하지 않았다.

1893년에 동학도들이 보은집회를 열고 교조신원(敎祖伸寃)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천명해 호서 · 호남지방이 동요하게 되자 양호순무사(兩湖巡撫使)로 임명, 파견되었다. 당시 관료들이 모두 동학도들을 비도(匪徒)라고 탄압하려는 분위기 속에서 어윤중은 처음으로 동학도들을 대담하게 ‘민당(民黨)’이라고 하여 그들의 요구에 동정을 표시하였다. 이로 인해 동학농민들로부터는 지지를 얻고 관료들로부터는 빈축을 샀다. 하층농민들로 구성된 동학도들을 ‘민당’이라고 부른 것은 어윤중이 처음이었다.

1894년에 갑오경장 내각이 수립되자 김홍집 내각과 박정양 내각에서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이 되어 재정 · 경제부문의 대개혁을 단행하였다. 특히, 어윤중의 잡세 혁파 및 무토궁방세 혁파와 조세법정주의에 의거한 조세제도의 개혁은 농민층의 부담을 크게 경감시켰다.

어윤중은 온건개혁파에 속한 인물이었지만 개인적 성품은 매우 강직하고 담대하였다. 갑오경장 중에는 고종과 민비의 작은 요청도 법률에 어긋난 것은 모두 거절하였다. 일제측도 300만원의 차관을 일본화폐로 주려고 제의했다가 은(銀)이 아니면 받지 않겠다고 하여 거절당하였다.

갑오경장의 재정 · 경제부문의 전반적 대개혁은 어윤중이 중심이 되어 단행되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에 의해 갑오경장 내각이 붕괴되자 대부분의 각료들이 국외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어윤중은 김홍집과 함께 일본으로의 망명을 거절하고 고향인 보은으로 피신하였다. 어윤중은 자신이 농민들로부터 지지를 얻고 있었으므로 고향으로의 피란이 안전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윤중이 경기도 용인을 지날 때 산송문제(山訟問題)로 원한을 품은 향반 무리가 머슴을 동원하여 기습, 1896년 2월 17일 49세의 나이로 피살되었다.

저술활동

저서로는 『동래어사서계(東萊御史書啓)』 · 『수문록(隨聞錄)』 · 『서정기(西征記)』 · 『간독요초(簡牘要抄)』 · 『종정연표(從政年表)』 등이 있다. 1979년에 아세아문화사에서 『어윤중전집』이 간행되었다.

상훈과 추모

1910년에 규장각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고종기사(高宗紀事)』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매천야록(梅泉野錄)』
『어윤중전집』(아세아문화사, 1979)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신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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