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 ()

연담대사임하록
연담대사임하록
불교
인물
조선 후기, 편양파 승려로 전라남도 해남 대둔사의 12대 종사이며 『임하록』, 『대교유망기』 등을 저술한 승려.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20년(경종 1)
사망 연도
1799년(정조 23)
본관
개성 천씨(開城千氏)
출생지
전라남도 화순군
주요 저서
『임하록』, 『대교유망기』, 『제경회요』
주요 작품
『임하록』, 『대교유망기』, 『제경회요』
주요 관직
표충사 원장
관련 사건
불교 심성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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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유일(有一)은 조선 후기 편양파 승려로 전라남도 해남 대둔사(大芚寺)의 12대 종사이며 『임하록(林下錄)』, 『대교유망기(大敎遺忘記)』 등을 저술한 승려이다. 스승 호암 체정(虎巖體淨)을 비롯한 당시의 대표적인 학승 10명으로부터 배웠고 특히 설파 상언(雪坡尙彦)으로부터 화엄학을 수학한 후 30년 이상 화엄 등의 교학을 강의했다. 그는 승려 이력 과정 교재에 대한 주석서인 사기(私記)를 다수 남겨 강학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의
조선 후기, 편양파 승려로 전라남도 해남 대둔사의 12대 종사이며 『임하록』, 『대교유망기』 등을 저술한 승려.
가계 및 인적사항

연담 유일(蓮潭 有一, 1720~1799)은 개성 천씨(開城千氏)로 전라남도 화순 출신이다. 유일의 자(字)는 무이(無二)이다.

주요 활동

유일(有一)은 5세 때부터 『맹자』, 『대학』, 『중용』, 『통감(通鑑)』 등의 유교 경서와 역사를 공부했다. 그러나 그가 7세가 되던 해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13세가 되었을 때는 모친이 세상을 떠났다. 이후 유일은 18세에 전라남도 무안 승달산 법천사(法泉寺)의 성철(性哲)에게 출가하였고, 다음 해에 안빈(安賓)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유일은 당시 10대 법사로 유명했던 벽하 대우(碧霞大愚, 1676∼1763), 상월 새봉(霜月璽封, 1687∼1767), 풍암 세찰(楓巖世察, 1688∼1767), 영해 약탄(影海若坦, 1668∼1754), 호암 체정(1687∼1748), 설파 상언(1707∼1791) 등에게서 사집과(四集科), 사교과(四敎科), 대교과의 이력 과정에 포함된 강학 교재들을 체계적으로 학습했다. 이들 가운데 연담 유일의 전법 스승인 호암 체정으로부터 대교과의 『선문염송(禪門拈頌)』을 배웠고 사형인 설파 상언에게서 화엄학(華嚴學)을 공부하였다.

유일은 30대가 되던 1750년(영조 26)에 장흥 보림사(寶林寺)에서 개강(開講)하여 『원각경』 등을 강의하였다. 이후 30년 동안 유일은 화엄(華嚴)을 중심으로 한 교학을 강론하였다. 1768년에는 미황사(美黃寺)에 주석하였고, 1777년에는 임진왜란 때 의승장이었던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사명 유정(四溟惟政, 1544∼1610) 등을 모신 표충사의 원장이 되었다. 1779년(정조 3)에는 창평 서봉사(瑞峯寺)의 주지를 맡았으며, 1799년 자신이 처음으로 개강했던 보림사 삼성암(三聖庵)에서 세수 80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학문과 저술

전라남도 해남 대둔사의 제12대 종사인 연담 유일은 과 교에 모두 정통하였지만 특히 화엄학의 대가였다. 그는 평생을 강학에 전념하면서 이력 과정 교재에 대한 주석서인 사기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현재 전하는 유일의 저서는 모두 14종 23권으로 문집인 『임하록』, 여러 경전의 요체를 정리한 『제경회요(諸經會要)』, 불교 용어 사전 『석전유해(釋典類解)』 등이 있다.

이력 과정의 사집과인 고봉 원묘(高峰原妙)의 『선요(禪要)』, 대혜 종고(大慧宗杲)의 『서장(書狀)』, 종밀(宗密)의 『도서(都序)』와 지눌(知訥)의 『절요(節要)』, 그리고 사교과의 『금강경』, 『원각경』, 『대승기신론』에 대해 유일이 쓴 사기가 지금도 남아 있다. 또 대교과의 『선문염송』『화엄경』에 대한 사기도 전한다. 특히 유일이 가장 공력을 기울여 쓴 것은 흔히 '유망기(遺忘記)'로 불리는 화엄학 관련 사기였다. 연담 유일은 영남의 인악 의첨(仁岳義沾)과 함께 당시 강학의 쌍벽을 이루었다. 그러나 화엄은 유일의 것이 훨씬 자세하고 사교과에 대한 주석은 의첨이 더 낫다는 평가도 있다.

유학의 대의명분론과 중화 정통주의를 내세웠던 시대에 유일은 공감하는 지식인이었다. 유일은 '당 · 송 이후 중국의 명유들이 불교를 탐구하고 이치와 본성에 대해 승려들과 논의하여 유교와 불교가 근본에서 같음을 알았으며, 주희(朱熹) 또한 성리학의 기틀을 세우는 데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조선의 유학자들은 불교를 모르면서도 허무하다는 비판만 일삼으며, 과거 공부에만 몰두한 나머지 실천 수행의 공부가 부족하다고 지적하였다.

한편 유일은 부휴계 묵암 최눌(默庵最訥, 1717∼1790)과 일원적 절대성과 다원적 상대성을 둘러싼 불교 심성 논쟁을 펼쳤다. 유일은 “부처와 중생의 마음은 각각 원만하지만 본래는 하나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비해 최눌은 “부처와 중생의 마음은 각각 따로 원만하며 원래부터 하나가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유일과 최눌의 논쟁은 화엄학의 성기(性起)와 연기(緣起), 리(理)와 사(事)의 법계(法界)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이것은 당시 유행하던 이기심성(理氣心性)에 기반한 유학의 호락논쟁(湖洛論爭)과 연동한 불교계의 대응 논리였다. 부처와 중생의 마음을 둘러싼 일원성과 다원성에 관한 인식은 호락논쟁에서 성인과 범인의 ‘마음의 같고 다름’, ‘인성과 물성의 차이’ 문제와 연동시켜 이해할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임하록(林下錄)』
『제경회요(諸經會要)』
『석전유해(釋典類解)』
각종 사기(私記)

단행본

김용태, 『조선불교 사상사』(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21)

논문

이지관, 「연담 및 인악의 사기와 그의 교학관」(『한국불교사상사』, 원불교사상연구원, 1975)
이진영, 「연담유일 연구」(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0)

인터넷 자료

기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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