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경은 조선전기 대사헌,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499년(연산군 5)에 태어나 1572년(선조 5)에 사망했다. 갑자사화에 연좌되어 6세에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해배되었다. 1522년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문과에 급제하였다. 1565년 영의정에 임명되었는데 하성군 이균을 왕으로 세우고 원상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다. 기묘사화와 을사사화 때에 화를 입은 사류들의 신원을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수십 년간 유배 생활을 한 노수신·유희춘 등을 석방해 등용하였다. 붕당을 예견하였다가 이이·유성룡 등 신진 사류들의 규탄을 받았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화를 입어 사사된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연좌되어 6세의 어린 나이로 형 이윤경(李潤慶)과 함께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외할아버지 신승연(申承演)과 황효헌(黃孝獻)에게서 수학하고 이연경(李延慶)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웠다.
1522년(중종 17)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1531년(중종 26) 식년 문과에 급제해 한림을 거쳐 1533년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그해 말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경연에 나가 중종에게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사류들의 무죄를 역설하다가 오히려 권신 김안로(金安老) 일파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1537년 김안로 일파가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되어 세자시강원필선 · 사헌부장령 · 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1541년 홍문관직제학 · 부제학으로 승진되고 승정원승지를 지냈다. 그 뒤 한성부우윤 · 성균관대사성을 지냈고, 중종이 죽자 고부부사(告訃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1545년(인종 1) 을사사화 당시 평안도관찰사로 지방에 나가 있어 화를 면하였다.
1548년(명종 3) 다시 중앙으로 올라와 병조판서 · 한성부판윤 · 대사헌을 역임했으나 1550년 정적이던 영의정 이기(李芑)의 모함으로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53년 함경도지방에 야인들이 침입하자 함경도순변사가 되어 그들을 초유(招諭)하고 성보(城堡)를 순찰하였다.
이어 대사헌과 병조판서를 다시 지내고 형조판서로 있다가 1555년 을묘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도순찰사로 출정해 이를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우찬성에 오르고 병조판서를 겸임했으며, 1558년 우의정, 1560년 좌의정, 1565년 영의정에 올랐다. 1567년 하성군(河城君) 이균(李鈞)을 왕으로 세우고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다.
이 때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을사사화로 죄를 받은 사람들을 신원하는 동시에 억울하게 수십 년간 유배 생활을 한 노수신(盧守愼) · 유희춘(柳希春) 등을 석방해 등용하였다. 그러나, 기대승(奇大升) · 이이(李珥) 등 신진 사류들과 뜻이 맞지 않아 이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1571년(선조 4)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임종 때 붕당이 있을 것이니 이를 타파해야 한다는 유차(遺箚)를 올려 이이 · 유성룡(柳成龍) 등 신진 사류들의 규탄을 받았다. 저서로는 『동고유고』 · 『조선풍속(朝鮮風俗)』 등이 있다. 선조 묘정에 배향되고, 충청도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