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5년에 19세의 나이로 승과에 합격하였고 이후 김생사(金生寺) · 부인사(夫人寺) · 덕천사(德泉寺) · 개태사(開泰寺) 등지에서 수행하며 화엄종의 주요 승려로 활약하였다. 58세가 되던 1364년(공민왕 13)에는 중국 강남 지역을 유학하였다. 1366년에는 이미 입적한 몽산덕이(蒙山德異)와 성안사(聖安寺)의 만봉시위(萬峯時蔚)로부터 인가를 얻고 귀국하여 고려말 불교계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게 된다. 그의 비문에는 평소 선지를 참구(參究)하다가 소백산, 금강산, 오대산 등에서 꿈에 임제종 선승인 몽산덕이로부터 의발(衣鉢)을 전수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1364년(공민왕 13)에 원에 들어가 휴휴암에서 몽산의 영정을 모신 진당에 간 일화가 전한다. 몽산덕이는 13세기 후반 이래 고려 선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러한 사실이 화엄종 승려인 천희의 행적에서도 확인된다.
천희는 또한 교학 승려임에도 불구하고 간화선(看話禪)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다수의 선종 승려들과도 가깝게 교류하였다. 그의 간화선 수용은 당시 유행하는 새로운 불교 사상에 대한 적극적 대응인 동시에 이론 탐구보다 실천 수행을 중시하는 의상계 화엄종의 전통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천희는 1365년에 국사로 책봉된 뒤 당시 왕사(王師)였던 나옹 혜근과 함께 선교(禪敎)의 공부선(功夫選)을 맡았으며 1371년 신돈이 실각할 때까지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신돈이 실각한 후 천희는 국사에서 물러나 화엄종의 종찰인 부석사의 주지를 맡아 사찰을 중창하였다. 이후 금강산 · 오대산 등 여러 사찰을 다니면서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1368년에 수원 광교산의 창성사(彰聖寺)에서 입적하였다.
시호는 진각(眞覺), 탑호(塔號)는 대각원조(大覺圓照)이다.